코끝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뜨겁고 강렬하던 여름의 태양은 어느새 늦가을의 부드러운 햇살로 바뀌어 있었고 아침 공기는 제법 서늘했다. 새삼 계절의 변화가 신기했다. 주말농장에 도착한 살레시오 방화동 나눔의 집 아이들의 표정에는 시원함과 섭섭함이 교차했다. 오늘은 살레시오 방화동 나눔의 집이 (아름다운재단이 지원하고 한국아동단체협의회가 진행하는) ‘아동청소년 문화체험 활동 지원사업’으로 시작한 주말농장의 마지막 날인 것이다. 지난 6개월 동안 직접 감자, 고구마, 고추, 토마토 등 각종 농작물을 가꿔온 아이들. 이제 마지막 농작물인 배와 무, 파 등을 수확하고 그것으로 김장을 하면 한 해 농사는 끝이다. 낯선 농사일이 힘들고 때론 벅찼지만 마음만큼은 어느 때보다 풍성한 한해를 보낸 살레시오 방화동 나눔의 집 아이들. 주말농장은 흙과 햇빛과 바람으로 농작물 뿐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밝고 건강하게 성장시켰다.
도시 소년, 농부가 되다
“이거 봐, 이거 땅강아지지?”
“어디? 아니야. 사마귀 같은데? 사마귀가 죽으면 이런 모습이더라고.”
주말농장 밭에서 배추를 뽑아 흙을 툭툭 털어내던 미르의 질문에 용갑이가 명쾌하게 답을 한다. 6개월 동안 밭일을 하고, 흙에서 뛰어 놀며 자연스럽게 곤충들이 익숙해진 것이다. 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벌레 먹은 배추 잎을 뜯어내다 살레시오 방화동 나눔의 집의 염미정 시설장에게 질문한다.
“이모, 이 배추는 벌레가 너무 많이 먹은 거 같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 벌레 먹거나 시든 잎을 뗀 배추는 흙 묻지 않게 저쪽에 잘 쌓아놔 줘”
살레시오 나눔의 집은 청소년들에게 안정적인 가정환경을 제공하는 가정공동체로 방화동 나눔의 집에는 초등학생을 포함해 총 6명의 청소년이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아이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염미정 시설장과 보육사를 아이들은 모두 ‘이모’라 부른다. 이모처럼 푸근하고, 따뜻하게 아이들을 감싸주고, 보살펴주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눔의 집의 막내이자 동갑인 미르와 용갑이는 염미정 시설장에게 확인 받은 배추를 밭 한쪽의 배추 더미로 자연스럽게 옮겼다. 아이들의 부지런한 손길에 어느덧 배추밭은 절반 넘게 수확이 끝나 있었다. 염미정 시설장은 의젓하게 밭일을 하는 아이들의 대견함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의 손보다 큰 목장갑을 끼고 누가 말하기 전에 먼저 제 몫의 밭일을 해내는 아이들은 어엿한 꼬마 농부로 성장해 있었다.
“얘들아, 배추가 무겁지 않아?” “괜찮아요. 여기 쌓여있는 배추는 수돗가로 옮기면 되죠?” “그래주면 고맙고. 잠깐 힘들면 쉬었다 해.” “이모, 배추 다섯 포기만 더 가져다 달래요.”
잰 걸음으로 손질한 배추를 수돗가로 옮기던 미르가 이번에는 수돗가에서 일하는 유은순 보육사의 요청을 전달한다. 아이들은 점심을 준비하는 바비큐 조, 김장 재료를 손질하는 김장 조, 농작물을 수확하는 수확 조 세 분야로 나뉘어 제각각 맡은 일을 하던 중이었다.
“가족이 모두 함께 움직여 뭔가를 같이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추억이 되는 것 같아요. 농사를 해 본적이 없어 밭일이 힘들었을 텐데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아이들이 따라준 게 기쁘고 고맙죠.”
주말농장을 기획했던 유은순 보육사는 온 가족이 함께 움직여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을 생각했다. 처음엔 올해 초 겨울방학 동안 집에서 휴대폰과 텔레비전으로 소일하는 아이들을 움직이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때 마침 어릴 때 주말농장을 해본 경험이 있는 영현이가 주말농장을 제안했단다. 유은순 보육사 역시 이미 몇 년 동안 주말농장을 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주말농장은 아이들을 움직이게 했다. 씨앗을 뿌리고, 나날이 커가는 농작물을 돌보고 수확하는 과정은 아이들에게 성취감 뿐 아니라 책임감도 알려줬다.
주말농장에서 수확한 ‘추억’
“이모, 여기 간 좀 봐주세요.” “양념이 한쪽으로 몰렸어요. 배추를 뒤집어야 할 것 같아요.”
농작물 수확과 김장 재료 손질이 끝나자 이번엔 영현이, 재윤이, 용갑이가 고무장갑을 끼고 배추를 양념에 버무리기 시작한다. 배추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김치를 버무리는 영현이의 손끝이 야무지다. 곁에서 아이들 솜씨를 지켜보던 염미정 시설장과 유은순 보육사는 완성한 김치를 통에 부지런히 담는다. 올 겨울 내내 온 가족이 맛있게 먹을 김치였다.
“우리가 직접 키운 배추로 담근 김치니깐 더 맛있을 거 같아요. 김치 담그고 남은 배추와 무는 신월동 나눔의 집과 성당에 나눠줄 예정이에요. 작은 밭인데도 항상 우리가 먹는 것을 빼고도 농작물이 많이 남더라고요. 참 감사한 일이죠. 주말농장 덕분에 아이들이 나눔까지 배울 수 있었어요.”
받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이 나눔도 배우길 바랐던 염미정 시설장과 유은순 보육사는 김장을 하고도 잔뜩 남은 배추와 무는 차에 실었다. 이웃인 신월동 나눔의 집과 성당에 농작물을 나누면 정말 주말농장 프로그램은 끝이다. 문득 한 해 동안 온 가족이 주말농장에서 함께 한 시간이 떠올랐다. 단발적인 이벤트가 아닌, 6개월 내내 농작물을 키워야 하는 주말농장은 살레시오 방화동 나눔의 집 가족에게 조금은 벅찬 일이었다.
봄에는 밭의 돌을 골라내며 땅을 고르고, 씨앗을 뿌려야 했다. 특히 올봄에는 가물어 물주기가 큰일이었다. 여름에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잡초들을 뽑느라 바빴다. 일주일만 지나도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다. 하지만 감자와 고구마, 토마토, 가지, 고추 등이 올망졸망 열리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하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감동이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밭일을 해야 하는 것이 때론 힘들고 귀찮았지만 바구니 가득 농작물을 수확하면 왠지 모르게 힘이 쏟고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우리가 키운 감자로 감자튀김 해 먹은 게 제일 기억에 남아” “밭에서 따서 바로 먹어서 그런가 토마토도 진짜 맛있었어.” “나는 처음 밭에서 돌 골라내며 흙을 고를 때 벌레가 너무 많이 나와서 깜짝 놀랐어. 그렇게 많은 벌레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 “여름에 아침 일찍 와서 농작물 돌보고 난 뒤에 짜장면 먹었던 게 제일 좋았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고, 좀처럼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법이 없는 사춘기 소년들이 주말농장을 나서며 기억에 남았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작고 평범한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모든 순간이 추억이 된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지금도 풀벌레, 땅벌레보다 휴대폰 게임기가 익숙하고, 주말 농장의 흙보다 도시의 콘크리트가 더 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온 가족이 같이 땀 흘리며 흙과 햇빛과 바람을 함께 느낀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재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평범하고 따뜻한 시간이 쌓아올린 추억은 아이들에게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크고 단단하게 열매를 성장시키는 흙과 햇빛과 바람처럼 말이다.
글 이명아ㅣ사진 김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