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거제도 장애인 생활 시설 반야원의 축제가 열리는 날. 구성진 트로트 노래가 흘러나오는 메인 무대를 둘러싸고 앉은 어르신들은 흥겨운 노랫가락을 따라 부르며 박수를 쳤다.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무대 위로 탈을 쓴 아이들 열 댓 명이 우르르 올라왔다. 우리 가락에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넉살 좋게 무대를 시작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단숨에 모든 이들의 시선을 모았다.
아이들은 거제시 청소년 수련관의 ‘꿈 나와라 뚝딱! 예술 도.깨.비’ 팀. 아름다운재단과 한국아동단체협의회의 아동청소년 문화체험 활동 지원사업으로 거제 영등오광대 마당극을 배운 아동들이 마침내 첫 공연을 올리게 된 것이다. 옛 말투로 그럴싸하게 대사를 하는 양반과 양반을 혼내는 의뭉스러운 말뚝이의 말 한마디, 춤 한 사위에 박장대소가 터진다. 첫 공연지만 아이들의 마당극에 흠뻑 빠진 어르신과 자신감 넘치게 무대를 이끌어가는 도깨비 팀의 무대는 오늘 축제의 주인공이었다.
거제 영등오광대를 아시나요?
“쉬이, 양반님네들~ 이렇게 좋은 자리에 모처럼 양반님들이 다 모였으니 저 건너 마을 원더걸스, 핑클, 에스이에스 선녀들을 불러다가 신명나게 놀아 봅시다.” “엥, 그 선녀들은 다들 은퇴하고 어멈이 되지 않았소?” “요즘엔 트와이스, 마마무 선녀가 대세라오”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등장한 양반탈을 쓴 아이들이 걸그룹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무대로 올린다. 옛 마당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낭랑한 아이의 목소리로 넉살좋게 ‘양반님’ ‘선녀’ ‘어멈’ 등을 말하자 관객석에선 웃음이 터진다. 아이들의 오광대 마당극이 대견하기도 하고 귀여운 것이다.
거제 청소년 수련관의 ‘예술 도깨비’팀이 거제의 탈춤극 ‘영등오광대’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지난 8월 무렵. 문화체험을 통해 ‘도전하고, 깨어나고, 비상하자’는 의미로 거제 청소년 수련관은 방과 후 아카데미의 5~6학년 아동들을 대상으로 ‘예술 도깨비’를 모집했다.
“거제지역의 조선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전반적인 분위기가 침체돼 있어요.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문화적인 소외도 있죠.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거제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거제 전통문화인 영등오광대를 배우면 거제에 애착을 가질 것 같아 시작했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거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싶었다는 손윤정 관장. 성장기의 고향은 지리적, 환경적 요인일 뿐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의 토대이며, 풍요롭고 따스한 성장기를 거쳐 아이들은 성숙한 어른이 성장한다. 다시 말해 손윤정 관장은 고향 거제가 단순히 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추억과 애정이 묻어나는 공간으로 기억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힘을 얻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되길 바란 것이다. 거제의 전통 마당극인 거제 영등오광대는 고향에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안성맞춤인 문화체험이었다.
다섯 광대가 다섯 마당을 하는 ‘오광대’는 본래 경남 지역의 탈놀이로 통영, 고성 등 여러 지역에 전승됐다. 거제 영등오광대는 거제의 학산이 옛 지명인 ‘영등’에 전해오던 것. ‘예술 도깨비’가 공연한 것은 영등오광대 중에서 네 번째 마당인 ‘말뚝이 마당’이다. 가짜 양반들이 잘난 체 하다 말뚝이에게 혼쭐이 나는 내용인데 요즘말로 ‘사이다 돌직구’를 뱉는 말뚝이의 일침이 통쾌하다.
“말뚝이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정의로운 역할이잖아요. 그래서 말뚝이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연습할 때는 동작이 잘 안 나오고, 틀리는 부분도 있어 불안했는데 공연에 올라가니깐 하나도 안 떨렸어요. 처음엔 조금 부끄럽기도 했는데 점점 재밌더라고요.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도 좋았어요.”
공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화사하게 웃는 말뚝이, 유재은 학생. 재은이 뿐만 아니었다. 아이들은 공연을 끝낸 게 믿기지 않는 듯 잔뜩 상기돼 있었다.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소리는 아이들의 심장을 더욱 뛰게 했다.
마당극에서 배운 배려와 성취감
“아이들이 옛것을 현대화해서 공연한 게 뜻 깊었어요. 오늘 공연 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거 같아요. 특히 어르신들이 많이 웃으시더라고요. 다른 행사에서도 선보이면 좋을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의 찬사와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다른 행사에서도 보고 싶다’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좋았다’ 등의 칭찬이 이어졌다. 박규리 청소년지도사와 전 거제영등오광대 사무장으로 아이들을 지도한 이경숙 강사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난주만 해도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애들이 무대 체질인가 봐요. 이경숙 강사님의 오광대 공연을 직접 보고, 연습하면서 점점 나아지긴 했는데 전통의 장단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거든요. 공연에 걱정이 앞섰는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불과 4개월 만에 ‘탈 만들기’부터 풍물, 탈춤, 마당극을 익혀 공연까지 올리는 게 가능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는 박규리 지도사. 더욱이 케이팝 댄스 등 서구의 리듬에 익숙한 아이들이 굿거리장단, 자진모리장단 등 이름도 낯선 전통 장단에 맞춰 어깨춤을 추고, 대사를 하며 마당극을 끌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여기에 탈 만드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신문지와 한지를 붙이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과정은 힘겨웠다.
“거제영등오광대는 다른 지역과 달리 대나무 소쿠리로 탈을 만들어 동글동글한 게 큰 특징이에요. 탈을 살 수도 있었지만 공연에 쓸 탈을 직접 만드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엔 시간이 부족해서 수련관의 많은 선생님들이 도움을 주셔서 잘 마무리됐죠.”
본격적인 마당극 연습을 시작하면서 몇몇은 풍물을 익히고, 극을 이끌어갈 오광대와 변사는 대사와 몸짓을 익혔다. 처음엔 어깨춤이며 우리 장단이 어색했지만 흡수가 빠른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솜씨가 발전했다.
“혼자서 여러 광대의 목소리를 내야하고, 몸짓에 딱 맞춰 대사를 하는 게 좀 어려웠어요. 대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해야 하잖아요. 연습할 때보다 더 잘 된 거 같아요. 애들이랑 같이 하니깐 떨리지도 않았어요.”
마당극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변사를 맡은 김민호 군은 앞으로 더 많은 공연을 하고 싶다고 당차게 말한다. 영등오광대 공연으로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아진 것이다. 김민호 군만이 아니다. 소극적이던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또 자주 툭탁거리던 아이들이 함께 공연을 준비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협동하는 것을 배웠다. 마당극 연습과 공연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된 것이다. 그리고 짧은 기간에도 변화하고 성장한 아이들을 모습에 손윤정 관장과 박규리 지도사는 놀라워하며 새삼 문화체험과 교육의 힘을 느꼈다.
“애들이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눈물이 날 정도예요. 아이들이 자신감과 성취감을 갖는 게 보여서 정말 좋았어요. 4학년이라 참여 못한 아이가 공연하는 걸 보고 내년에는 자기도 꼭 하겠다고 벌써 신청했어요. 올해 뿐 아니라 내년에도 계속 사업을 이어가고 싶어요.”
전문가의 공연 같은 완성도는 없었다. 마당극을 처음 배워 연습하고,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것에 가슴 설레 하는 아이들의 마음이면 충분했다. 백지에서 시작해 공연이라는 결과물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는 것이다. 예술 도깨비들의 공연을 보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서 행복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이 엿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글 이명아 ㅣ 사진 김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