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아(16세), 노윤경(16세), 노인경(17세), 고영진(17세), 박성우(17세), 지대한(17세), 최우주(18세), 최화정(18세). 이상 8명은 안산의 다문화거리 원곡동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이주배경 청소년들이다. 부모님의 나라에서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서든 ‘지구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없기에,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아닌 ‘지구인 아이들’로 불리기를 원한다. 어려서부터 한 동네에서 자라나 형제자매처럼 막역한 우애를 자랑하며, 멤버 중 절반이 진짜 남매(성아&성우)와 자매(윤경&인경)이기도 하다.
지구인 아이들의 희망 여행지 1순위는 처음부터 일본 오사카였다. 멤버 모두 ‘내 생애 꼭 한번 가보고 싶은 테마파크’로 손꼽은 유니버셜스튜디오 재팬, 애니 성지순례를 위한 덴덴타운, 식도락 여행의 끝판왕 도톤보리…. 오사카 여행에 대한 아이들의 기대감은 이처럼 분명하고 구체적이었다. 제대로 둘러보자면 4박 5일 일정이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었으나, 도시 하나만 찍고 오기엔 아쉽다는 생각에 욕심을 좀 더 부렸다. 넷째 날과 다섯째 날, 1박 2일을 할애한 고베는 오사카에서 한 시간 이내에 갈 수 있는데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아기자기한 건물 등 일본다운 멋과 맛이 쏠쏠하다는 이유로 선택한 도시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친구들답게 서로의 성격과 장단점에 익숙해,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끔 역할을 분담했다. 이를테면 꼼꼼한 성격의 화정에게 회계를, 식도락 여행에 가장 열정적인 대한에게 메뉴담당을 맡기는 식이었다. 리더(성아), 회계(화정), 회계보조(대한), 길잡이(영진, 성우, 우주), 타임키퍼(윤경, 우주), 메뉴담당(대한), 사진담당(우주), 일정정리(인경), 라스트키퍼(영진)를 정하고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 안에서 사전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꿈꾸는 여행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혼자만의 여행이 아닌 ‘함께 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여럿의 로망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여정을 짜되, 자유시간을 배치해 개인적인 로망도 소외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오사카에서 ‘인생 테마파크’를 만나다
닛폰바시역 근처에 위치한 한인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7시 반 무렵. 짐을 풀고 신사이바시까지 걸어가 카레전문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가고자 했던 집은 아니었지만(애써 찾아갔던 유명 맛집은 대기 줄이 너무 길었다) 일본에서의 첫 끼니는 모두를 만족시켰다.
관광객이 몰리는 유명 맛집 말고 조금 한적한,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을 찾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엔 인터넷에서 찾아본 집 말고 ‘저 집 맛있을 거 같은데?’ 하는 촉이 오는 곳을 갔어요. 그렇게 고른 집이 맛있으면 엄청 뿌듯하더라고요.” (대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도톤보리의 야경을 즐겼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독특한 간판 디자인 구경만으로도 설레는 도심의 여름밤. 오사카 인증샷의 필수코스라 할 글리코상을 배경으로 단체사진도 찍고, 슈퍼마켓에 들러 아침식사거리를 골랐다. 일본에서의 첫 밤. 설레고 두근거려 쉬 잠들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11시엔 무조건 불을 껐다. 둘째 날은 멤버 전원의 버킷 리스트를 실현하는 날이었으므로.
음식, 애니메이션, 패션, 건축…. 오사카에 대한 8명의 관심사는 조금씩 달랐으나, 멤버 모두 ‘이것만은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고 의기투합했던 여정이 바로 유니버셜스튜디오였다. 디즈니랜드와 함께 테마파크의 양대산맥으로 통하는 유니버셜스튜디오는 할리우드 대작 영화를 주제로 구성된 체험존이 매력 포인트다. 특히 해리포터존과 미니언파크의 인기는 상상 그 이상이라고. 잠 많은 아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것도, 개장시간에 딱 맞춰 입장해야 인기 있는 체험존을 선점할 수 있는 까닭이다. 개장시간인 오전 9시부터 폐장시간인 저녁 9시까지, 총 12시간을 꽉꽉 채워 놀았다. 유니버셜스튜디오가 아이들에게 준 감동은 다음과 같은 총평으로 충분히 짐작해볼만 하다.
이 놀이동산은 진짜, 정말, 대박, 헐! 혁명이에요!!” (박성아)
셋째 날 오전엔 조별 자유시간을 갖기로 하고, 세 팀으로 나눠 흩어졌다. 대한&성우&영진이 결성한 먹방팀은 도톤보리 길거리 음식 탐방에 나섰고, 우주&화정&윤경&인경이 뭉친 쇼핑팀은 디즈니스토어와 같은 도톤보리의 예쁜 상점가를 돌며 캐릭터용품 쇼핑에 나섰다. 홀로 애니메이션팀을 택한 성아는 지도교사들과 함께 덴덴타운을 구경했다.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관련 전문 숍이 즐비한 덴덴타운은 애니 덕후들의 성지로 통하는 곳. 만화가를 꿈꾸는 성아로선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가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다.
덴덴타운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귀한 O.S.T 앨범이 진짜 많았는데, 하나 하나 다 들어보고 싶었어요. 자유시간이 길지 않아 구경만 하고 지나쳐야 하는 게 너무 아쉬웠죠. 꼭 다시 가서 찬찬히 즐기고 싶어요” (박성아)
점심식사까지 조별로 해결한 뒤 모여, 단체로 유카타를 빌려 입고 나카자키쵸 카페거리를 찾았다.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한 카페와 잡화점이 몰려있는 나카자키쵸는 여자아이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거동이 불편한 옷과 신발이었지만, 전통복장 체험은 특별한 추억이 됐다. 일본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즐기며, 두 시간 남짓 폭풍 같은 인증샷을 남겼다.
유카타는 처음 입어봤어요. 옷이 워낙 예뻐서 인생샷을 많이 건졌어요. 한여름이라 엄청 더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원한 옷이었어요.” (노인경)
고베에서 ‘인생 스테이크’를 맛보다
넷째 날 오후엔 고베로 이동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찾아간 곳은 스테이크랜드. 고베규 스테이크는 고베 여행의 첫 번째 로망이었다. 고베규는 고베 지역에서 기른 흑우를 뜻하는데, 부드러운 육질을 위한 특별한 사육 방식이 거의 전설처럼 전해진다. 소에게 곡물과 맥주를 사료로 먹이고, 정기적인 마사지까지 해준다는 것. 눈꽃이 핀 듯한 마블링의 비결이다. 셰프가 눈앞에서 철판에 스테이크를 구워 접시에 놓아주는 시스템이라 일본인 셰프와 소통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었는데, 황홀한 스테이크와 셰프의 수려한 외모를 칭송하느라 여자아이들 쪽 자리에선 웃음과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구워내는 족족 고기를 흡입하며 쉼 없이 속닥거리고 까르르 넘어가는 소녀 식객들의 놀라운 멀티태스킹 능력에, 셰프들도 “카와이!”를 연발했다고. 고베규를맛본 뒤, 아이들은 스테이크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갖게 됐다. 세상의 스테이크는 그냥 스테이크와 고베규로 나뉜다고.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더라고요. 진짜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 사라졌어요. 아이스크림이나 버터처럼! 진짜 인생 스테이크였어요.” (노윤경)
식사를 마치고 밤 10시까지 하버랜드를 즐겼다. 쇼핑몰과 대관람차를 비롯, 다양한 즐길거리를 갖춘 하버랜드는 바다를 따라 조성된 대규모 유원지다. 오사카에선 줄이 길어 포기했던 대관람차도 탔다. 고베의 첫인상은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스테이크를 거쳐, 대관람차에서 바라본 항구도시의 낭만적인 야경으로 기록됐다.
마지막 날엔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투어버스를 타고 고베 곳곳을 돌았다. 일본에 왔으니 신사 하나 정도는 봐야 할 터. 태양신을 모신 이쿠타신사에선 애니메이션에 본 것처럼 부적 같은 점괘를 뽑기도 했는데, 연애운 ‘대길’을 뽑은 친구도 있었다. 라멘 전문점에서 점심을 먹고 기타노이진칸을 찾았다. 고베항 개항 당시의 외국인 거주지로, 고풍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서양식 건물이 남아있어 일본 속의 작은 유럽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여유롭게 머물진 못했지만 투어버스로 알뜰히 보낸 반나절 덕분에, 고베에서의 추억을 조금 더 쌓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들의 버킷 리스트’로만 달린 여행이었다. 공정여행에 대한 공부도 했고, 오사카의 다문화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는 선생님의 의견도 귀담아 들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었다. 테마파크에선 하루종일 놀아야 하고, 편의점 간식부터 전통음식점까지 먹방은 계속되어야 하며, 풍경사진보단 인증샷과 인생샷이 중요한 우리들만의 취향으로 가득 채운 여행. 십대의 솔직한 욕망을 나침반 삼은 4박 5일간의 오사카&고베 여정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P.S. 지구인 아이들이 권하는 여행의 기술
“여행 계획은 너무 빽빽이 세우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준비한 일정을 다 소화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조바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우주)
“엔화가 우리 화폐단위보다 0 하나가 적다보니, 더 저렴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 기분에 속아 이것저것 쓸데없는 쇼핑을 하면 ‘스튜핏’을 면할 수 없어요.” (화정)
“모르면 물어보는 게 가장 빨라요. 지도앱도 훌륭하지만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어요.” (대한)
“자잘한 계획까지 다 세우고 갈 필요는 없어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찾아낸 맛집이나 볼거리가 더 큰 즐거움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성우)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도 개인의 자유시간은 꼭 필요해요. 따로 또 같이 여행하다보면 추억이 더 풍성해져요.” (윤경)
글 고우정 l 사진 현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