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청소년 자발적 여행활동 지원사업’을 통해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우리 베프(VIET FRIENDS) 하자!’팀을 다시 만나봤습니다. 기수는 바뀌었지만 ‘베트남 프렌즈’의 활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는데요. 선후배 몇몇이 함께 모여 그 동안의 활동을 되돌아봤습니다.
끝나지 않은 여행의 기록
이예진(18세), 박정환(18세), 서예원(16세) 외 15명은 ‘2016 청소년 자발적 여행활동 지원사업’을 통해 ‘우리 베프 하자!’ 여행을 함께한 베프 3기 멤버들이다. 베프는 ‘베트남 프렌즈’의 줄임말로,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공부하고 알리며 평화를 꿈꾸는 청소년들의 자치모임이다. ‘우리 베프 하자!’는 베프 1기의 ‘베트남 평화봉사기행(2015년 1월)’과 베프 2기의 ‘베트남 평화기행(2016년 1월)’을 잇는, 베프의 세 번째 베트남 여행이다.
베프 활동에서 눈여겨 볼 점은 1기 때만 해도 ‘참여자’였던 청소년들이 2기부터 여행의 ‘주최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베프의 시작은 2014년 의정부혁신교육지구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베트남 평화봉사기행’에 뿌리를 둔다.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50주년을 기념하며 역사의 현장을 바로보고 평화를 다짐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프로그램으로, 당시엔 의정부시내 몇몇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지역 내 청소년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모집해 기행단을 꾸렸다. 그렇게 시작된 베프 1기 기행의 후폭풍은 대단했다.
민간인 학살 피해지역의 생존자와 유가족 분들을 뵙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여행을 준비하며 이미 책으로 읽었던 내용인데도, 직접 만나 들으니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여행 내내 울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불쑥불쑥 눈물이 났어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여행 멤버들과 모임을 계속 이어갔어요. 우리도 더 알아야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예진)
어떤 종류의 진실은 그 진실과 마주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한다는 걸, 아이들은 베트남 여행을 통해 톡톡히 깨달았다. 너무 참혹했지만 눈을 돌릴 수도, 잊을 수도 없었다. ‘기억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2기, 3기로 이어진 베프의 평화기행과 기행 때마다 학살 피해지역 학교와 유가족에게 전달한 장학금 및 제사 지원금(2015년에 240여만 원, 2016년에 290여만 원 전달)이 그 노력의 결과인 셈이다.
눈물과 웃음이 교차한 7박 9일
베프 3기 여정은 베트남 남부 호치민과 중부의 다낭과 호이안, 퐁니‧퐁넛마을과 하미마을로 이어졌다. 호치민에서 이틀 밤을 묵고, 다낭과 호이안에서 닷새를 묵었다. 호치민에서 보낸 2박 3일은 평화기행의 전체적인 맥락을 잡아주는 여정이었다. 전쟁증적박물관 관람, 사회적기업 아맙 탐방을 통해 베트남이 기억하는 전쟁의 민낯을 만났고, 이는 평화기행의 중심축이라 할 후반부 여정의 길잡이가 됐다. 학살 피해마을 생존자와 유가족, 고엽제 피해자들과의 만남엔 피해마을 인근에 위치한 판쩌우찐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그 친구들에게도 외국 친구를 사귄다는 자체가 꽤 설레는 일이었던 거 같아요. 케이팝 때문에 한국에 대한 호감이 크기도 했고요. 한국 아이돌 공연을 직관하는 게 꿈이더라고요. 짧은 영어로도 금세 소통할 수 있었던 건 공통점 때문이었어요.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를 그 친구들도 좋아했으니까요. 좋아하는 게 통하면 대화의 물꼬가 금세 트이잖아요.” (서예원)
판쩌우찐중학교 친구들, 통역을 맡아준 다낭외국어대학교 한국어학과 대학생들과의 교류는 베프의 평화기행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속적인 만남과 우정의 연대는 반드시 필요한 까닭이다. 가슴 아픈 여정에 동행한 베트남 친구들은, 함께 웃고 울며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위령비 참배와 유가족 간담회를 진행한 다음날엔 반드시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기억의 의무를 짊어지는 것은 당연했으나, 참혹한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지속할 수 있는 여행임을,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베프 멤버들은 알고 있었다.
기실, 호치민과 다낭, 호이안과 같은 베트남의 대표적인 관광도시에선 맛집과 관광명소를 두루 꿰는 평범한 자유여행도 보통의 여행자들처럼 즐겼다. 알록달록한 열대과일과 이국적인 수공예품으로 가득한 벤탄 야시장도 그 중 하나. 구경만으로도 흥미로웠지만 야시장의 진짜 재미는 상인들과 벌이는 ‘밀당’ 흥정에 있었다. 부르는 값의 60~70%를 일단 깎고 보는 흥정의 법칙이 처음부터 입에 착 붙진 않았으나, 어느새 상인이 제시하는 가격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와우~ 베리 익스펜시브~ 디스카운트!”를 외쳤으니. 돈을 쓰고도 번 것 같은 야시장의 마법에 취해, 밤이 깊도록 폭풍 같은 ‘탕진잼’을 즐겼다는 후문이다.
동남아 여행자라면 누구나 야시장에서 한번쯤 사 입었을 그 바지, 얇고 찰랑찰랑한 촉감의 몸빼는 단돈 2천원에 샀어요. 긴 바지라도 시원한 재질이라 동남아 여행의 필수 아이템이죠. 4천원에 산 샌들도 정말 예뻤어요. 다섯 명이 한 집에서 같이 샀는데, 몰아서 사면 더 잘 깎을 수 있거든요. 제가 좀 잘 깎는 편이긴 해요.” (이예진)
지독히 아픈 진실과의 대면
베프의 본격적인 평화기행은 민간인 학살사건이 벌어졌던 퐁니․퐁넛, 하미마을을 방문한 여행 후반부 3일에 몰려 있었다. 퐁니․퐁넛마을 입구에 자리한 위령비를 참배하던 날, 아이들은 비석에 새겨진 참혹한 진실 앞에 고개를 떨궜다.
위령비에 새겨 넣은 희생자 명단을 보면 출생연도와 이름, 성별을 확인할 수 있는데, 74명의 희생자 중 다수가 노인, 여성, 어린이였어요. 심지어 이름도 갖지 못한 갓난아기까지 있더라고요.” (박정환)
퐁니․퐁넛마을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티탄 아주머니도 찾아뵀다. 학살이 일어난 1968년 2월 12일. 당시 여덟 살의 응우옌티탄은 집 안팎에서 오빠와 다섯 살 동생과 이모가 총칼에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자신도 배에 총을 맞았지만, 여덟 살 소녀는 가까스로 죽음의 마을을 도망쳐 구조됐다. 다낭외국어대학교 대학생 언니(누나)들의 통역으로 아주머니의 증언을 전해들은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아주머니를 안았다. 울음을 터뜨리며 미안하다 사과하는 아이들을, 아주머니도 꼭 안아주었다.
하미마을 위령비 앞에선 퐁니‧퐁넛 때보다 더 무거운 마음을 견뎌야 했다. 위령비 한쪽, 비문이 있어야 할 자리를 덮은 연꽃문양 대리석 때문. 연꽃문양 대리석을 걷어내면, 하미마을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 과정을 소상히 밝힌 원래의 비문이 있을 터였다. 하미마을 위령비는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기부금으로 세워졌다. 한데 위령비 건립 과정 중 학살의 경과를 낱낱이 적은 비문에 대해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수정을 요구했고, 마을 주민들은 사실 그대로의 기록을 한 글자도 지울 수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위령비는 비문을 지우지 않은 채, 그러나 그 위에 연꽃문양이 그려진 대리석을 덧씌운 형태로 제막됐다.
복잡한 심경으로 위령비 참배를 마친 후, 고(故) 팜티호아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2013년에 돌아가신 팜티호아 할머니는 학살 당시 아들, 딸을 잃고 두 발목이 잘린 채 살아남은 생존자로, 135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하미 학살에 대해 증언하셨던 분이다.
팜티호아 할머니 댁에서 우리를 맞아주신 분은 할머니의 장남인 록 아저씨였어요. 하미 학살 땐 집을 떠나 다낭에서 일을 하셨던 까닭에 죽음을 비껴갈 수 있었는데,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 남아있던 지뢰에 눈을 다치셨어요. 1기 기행 때 뵀을 때만 해도 한쪽 눈의 시력은 남아있었는데, 그새 양쪽 시력을 다 잃으셨더라고요. 대학생 언니들이 아저씨의 이야기를 통역해주는 동안 저는 록 아저씨 옆에 앉아 아저씨 손을 꼭 잡고 있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인 것 같았어요. 아저씨가 고통스런 기억을 이야기할 땐 아저씨 손의 떨림을 통해 깊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어요.” (이예진)
팜티호아 할머니댁을 나와 인근 하미해변에 들렀다. 수건돌리기, 둥글게 짝짓기, 꼬리잡기 등 소풍 놀이의 모든 것을 판쩌우찐 친구들과 함께 했다. 아이들은 우느라 퉁퉁 부었던 눈을 반달로 접고 까르르 웃었다. 세상 걱정 없는 강아지들처럼, 해변을 신나게 뛰놀았다.
하미마을을 찾은 날은 판쩌우찐중학교와의 교류 마지막 날이었어요. 3일 동안 프로그램을 함께 하며 아이들과 많이 친해졌던 터라,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많이 서운하더라고요. 베트남 친구들은 대부분 베프 멤버들보다 두세 살 씩 어렸어요. 우리를 ‘언니’, ‘오빠’라 부르며 잘 따랐죠. 학살이 일어난 마을 인근 중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이지만, 그 사건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었어요. 베프의 기행을 함께 하며 처음 접한 참혹한 진실에 충격이 컸을 텐데, 울다가도 오히려 우리를 위로해주던 게 기억에 남아요. 먼저 말해줘서, 기억해줘서 고맙다고요.” (서예원)
기억엔 마침표가 없다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흩어지고도, 멤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베프의 평화기행을 이어간다. 베트남 관련한 뉴스가 나오면 귀를 쫑긋 세우는 버릇도, 불편하고 아픈 진실과의 만남을 주변에 자꾸 권하는 것도, 끝나지 않은 이 여행의 긴 꼬리인 셈이다. SNS로 연결된 판쩌우찐중학교 친구들과 다낭대학교 언니(누나)들의 안부를 살뜰히 챙기는 일도 그 중 하나.
베프 기행에 통역을 도와줬던 누나들 중에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온 누나가 있어요. 그 누나의 한국 이름도 우리 베프 멤버처럼 ‘예진’이에요. 제가 제2외국어로 베트남어를 준비한다고 하니, 예진누나가 무척 반가워했어요. 자신이 도울 게 없는지 늘 물어보시는데, 실제로 학교 과제를 하며 쏠쏠한 도움을 받았어요.” (박정환)
‘기억’을 약속한 베프의 여행엔 마침표가 없다. 한 기수의 여정이 끝나면 다음 기수의 여정이 곧 시작되는 까닭이다. 역사의 이면을 들춰 마주한 어두운 진실은 선하고 여린 마음에 상처를 냈지만, 아이들은 기꺼이 짊어진 기억의 의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발랄하게, 또한 진중하게.
학살의 희생자와 생존자만이 전쟁의 피해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참전군인도 피해자죠. 우리처럼 평범했던 사람이 살인자가 되어 돌아온 거잖아요. ‘슬퍼요, 눈물이 나요, 죄송합니다…’에서 끝이 아닌, 미래를 향한 한 발자국을 더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사실, 베프를 소개하는 멘트에 그 한 발자국에 대한 힌트가 들어있어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학살에 대해 공부하고 알리며 평화를 꿈꾸는 청소년들의 자치모임입니다’라는 멘트 중 ‘평화를 꿈꾸는’, 바로 이 대목이 포인트에요.” (이예진)
글 고우정 ㅣ사진 현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