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감온도 42℃. 습도 50%. 수십 년만의 기록적 폭염이 덮친, 그것도 한반도에서 제일 뜨겁다는 바로 그 도시, 대구. 바람조차 후덥지근한 7월 말의 한낮. 아름다운재단 ‘2018 장애아동청소년 맞춤형 보조기구 지원사업’의 대구지역 기기 납품은 하필 이런 날 시작됐다. 3일 동안 19곳 가구, 하루에 6~7집을 돌아야 하는 대구광역시 보조기기센터 담당자들은 맘이 바쁘다.
보조기기 납품은 그냥 기기를 놓고 오는 택배가 아니다. 장애아동 주거환경에 맞춰 기기를 설치해야 하고 당사자의 상황에 맞춰 기기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 보호자에게 사용법과 주의사항도 알려드리고 여러 가지 문의에 응대하고 때로는 민원사항까지 잘 청취해야 한 집 방문이 끝난다.
몸에 안 맞는 아기용 목욕시트는 이제 그만
‘장애 보조기기’라는 단어는 여전히 참 낯설다. 그나마 ‘휠체어’를 예시로 들어야 좀 이해가 쉽다. 그러나 보조기기는 휠체어 만이 아니다. 장애의 종류와 등급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리고 그만큼 비싸다. 기본이 수십 만원이고 많게는 수백 만원대로 뛴다. 생활 환경이 바뀌거나 아이가 성장하면 기기를 다시 장만해야 한다. 웬만큼 잘사는 집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기기를 갖추기가 쉽지 않다.
이 날 방문한 민영(6세, 가명)이네는 여러 보조기기 중에서 목욕시트를 지원받았다. 뇌병변 1급이라서 몸을 가누기 힘든 민영이를 여기에 눕힌 뒤 끈으로 고정시키면 보호자가 좀더 편하게 목욕을 시킬 수 있다. 받침대가 있어서 선 채로 아이를 씻길 수 있고, 바퀴가 있어서 이동도 편하다.
담당자들은 꼼꼼히 높이와 고정 끈의 길이를 조정하고 이동 경로나 보관 장소까지 다시 확인했다. 이미 몇 달 전에 현장 방문평가 때 주거환경을 점검했지만 실제 기기를 들여놓았을 때는 또 다를 수가 있으니 재차 확인이 필요하다.
이 집의 욕실 벽에는 영유아용 플라스틱 목욕시트가 걸려있었다. 아기들을 씻길 때 쓰는 도구라서 민영이 몸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민영이는 자꾸 어깨가 시트에 쓸려서 피부가 빨갛게 되곤 한다. 보호자가 매번 앉아서 불편한 자세로 아이를 씻기는 것도 고역이다. 아이를 안고 다니는 장애인 부모들은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산다. 아이 목욕 담당인 민영이 아버지도 디스크가 있다.
어머니는 새로운 보조기기가 들어온 것 자체가 신기하고 기쁘다. 그 동안 일주일에 2~3번씩 아이와 치료를 다녔지만, 보조기기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살았다. 그는 “이런 보조기기는 있는 줄도 몰랐고 처음 써본다. 다른 기기도 알아봐야겠다”면서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엄마랑 집에서 즐겁게, 놀이 같은 물리치료
반면 다솜이(12세, 가명) 어머니는 보조기기에 관심이 많다. 이미 집 입구에서부터 유모차, 착석보조기구 등이 놓여있었다. 모두 다른 장애아동 부모들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흔들의자에 놓인 착석보조기구에는 초록색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오랜 세월 여러 사람들을 거친 흔적이다.
다솜이 역시 뇌병변 1급이다. 스스로 몸을 움직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훈련이 필요하다. 오늘 납품된 기립보조기기는 다솜이가 혼자 설 수 있도록 근육의 힘을 길러준다.
담당자들은 조심스럽게 다솜이 몸에 맞게 기기를 조정했다. 기립보조기기는 발부터 머리까지 다양한 고정장치가 몸을 지탱해준다. 사용자의 신체 조건에 따라 부위별 패드의 위치도 바꾸거나 추가할 수 있다. 이 기기는 지금 120㎝인 다솜이가 더 자라서 140㎝가 될 때까지 앞으로 3~4년간 좋은 훈련 파트너가 될 것이다.
어차피 기기를 세팅한 김에 좀더 다솜이를 세워놓고 훈련까지 해보기로 했다. 서있는 것 자체가 힘든 운동일 텐데 다행히 다솜이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아기 때부터 자주 몸을 펴주고 1주일에 2번씩 기립훈련을 시킨 덕분이다. 이제 집에서도 더 자주 훈련을 할 수 있다.
다솜이 어머니는 웬만한 치료사 못지 않다. “머리 똑바로 해야지”라고 어르고 “피곤한 거 알아. 얼른 하고 자자”라고 달래면서 훈련을 이어나갔다. 꼿꼿이 서있어야 할 다솜이가 앞으로 몸을 기대자,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뽀뽀를 하면서 자신의 몸으로 다솜이를 뒤로 밀어냈다. 두 사람의 훈련은 물리치료라기보다 애정표현 혹은 놀이처럼 보였다.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보조기기… 기적 대신 작은 변화
이제야 처음 보조기기를 알게 됐든 오랫동안 여러 보조기기를 써봤든, 장애아동을 둔 부모의 모습은 참 비슷하다. 민영이네는 새 기기가 도착하는 모습을 창문으로 내다봤고, 다솜이네는 아예 1층으로 마중을 나왔다. 둘 다 보조기기를 보자마자 “이거에요?”라고 물으면서 눈을 반짝였다. 마치 몇 달 전부터 기다려온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아이 같았다.
그래도 정말 받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 진짜 소원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근사한 보조기기가 아니라, 보조기기가 필요 없는 삶. 아이와 함께 만들어가는 행복한 미래.
기적 대신 아주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이제 민영이는 더운 여름날에도 더 쉽고 편안하게 몸을 씻을 수 있다. 다솜이는 땡볕에 병원까지 가지 않아도 집에서 기립훈련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변화들을 만날 때 비로소 사람들은 희망을 품는다. 내일은 반드시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마음, 두 어머니의 설레는 표정에 담긴 바로 그 ‘희망’ 말이다.
아직도 장애아동들이 살아갈 이 땅의 현실은 척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더욱 열심히 대구광역시 보조기기센터는 폭염 속을 달린다. 지상의 산타클로스들이 비록 기적은 만들 수 없지만 작은 희망은 만들 수 있기에. 지켜내야 할 희망이 너무나도 많기에. 희망이 시작되는 그 날은 언제든 크리스마스이기에.
글 박효원 ㅣ 사진 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