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아픔과 차별의 역사를 간직한 땅이었지만 이제는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승리의 땅으로 기록하려 합니다. 아름다운재단은 우토로 역사를 기록하는 평화기념관 건립을 위한 <기억할게 우토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시민이 우토로 역사를 알아가고 함께 기억할 수 있도록 역사 강사 ‘큰별쌤’ 최태성 선생님과 함께 특별 역사 강연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지난 8월 4일 뜨거웠던 우토로 역사 강연의 현장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전해드립니다.

우토로’를 기억하는 발걸음

지난 8월 4일, 역사 강사 최태성 선생님의 <기억할게 우토로> 강연이 열렸다. 37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도 시민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경상도에서 온 노부부, 동료와 함께 온 30대 역사 선생님, 엄마 손을 잡고 온 8살 아이까지 나이와 사는 곳은 모두 달랐지만 ‘우토로를 기억하는 마음’은 같았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온 한 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우토로’를 처음 안 건 13년 전이에요. 일제강점기 이후 60년 넘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동포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모여 살던 터전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소식에 또 한 번 놀랐던 기억이 나요. 다행히 그때 함께 힘을 모아 지켰잖아요. 그때 우리가 ‘우토로를 함께 지켜낸 역사’를 기억하고 싶어서 오늘 왔어요.

출처: (좌)최태성 인스타그램 / (우)아름다운재단

출처: (좌) 최태성 인스타그램

이날 찾아온 시민들은 2007년 ‘우토로를 함께 지켜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현재의 우토로’의 상황을 듣기 위해 찾아온 이들도 많았다. 그 마음을 읽었던 걸까. 강연 전, 최태성 선생님은 우토로를 직접 다녀왔다. 그가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한 사진과 이야기로 이날 강연에서는 더 생생한 ‘우토로’를 만날 수 있었다.

최태성 선생님이 직접 다녀온 ‘우토로’ 이야기

지금 보시는 건물은 ‘함바’(집단 합숙소)에요. 이 나무판자는 1941년에 지은 그대로입니다. 당시 일제는 교토 비행장을 짓기 위해 우토로에 1,3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모읍니다. 그런데 4년 뒤 일본이 패전하자 비행장 건설이 딱 중단돼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거예요. 문제는 이분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여유가 없을 만큼 가난했다는 겁니다. 관리자나 일본인들은 다 떠나버리고 이분들은 말 그대로 이곳에 방치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이 공사장 함바집에 모여 살며 일군 마을이 바로 ‘우토로’입니다.

1945년은 우토로 사람들에게 아이러니한 해다. 조국 해방과 동시에 실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4년간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혹사당했지만, 고향에 돌아갈 뱃삯을 손에 쥔 이가 없었다. 이들이 받아온 일당은 하루하루 살기도 부족한 잡곡 세 홉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벌 수 없게 된 조선인들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줄줄 새는 함바집에 남아 빈터를 경작하고 철과 납 조각을 주우며 하루하루 살아남는다. 이들에겐 기댈 ‘조국’이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조선인’이란 이유로 이국땅에서 모진 ‘차별’을 반세기 넘게 겪는다.

저지대에 하수도 시설이 없는 우토로 마을 모습

저지대에 하수도 시설이 없는 우토로 마을 모습

정말 놀라운 건 우토로에 ‘상하수도’가 없었다는 겁니다. 1988년에서야 47년 만에 상수도가 들어오고, 7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수도가 없습니다. 어떻게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 이런 일이 있을까? 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요. 제가 갔을 때 곳곳에 물웅덩이가 보였는데요. 저지대라 비가 오면 물이 허리까지 찬답니다. 하수도가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비가 올 때마다 오물과 폐수로 다 뒤섞여 버리는 겁니다.

우토로 상수도 공사 모습과 철거 통지서

우토로 상수도 공사 모습과 철거 통지서

상수도가 들어와 주민들이 덩실덩실 춤을 췄던 1988년, 우토로의 각 집에는 ‘철거 통지서’가 배달된다. 땅의 소유주였던 ‘닛산’이 주민들 몰래 부동산 업자에게 땅을 팔아버린 것이다. 2005년, 강제퇴거 위기 속에서 우토로 사람들은 조국을 향해 마지막 호소를 한다. 그제야 비로소 60년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우토로 마을’이 한국에 알려진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던 <무한도전:배달의무도편> 유재석 씨의 말이 널리 회자됐던 것도 이 때문이다.

아름다운재단 '우토로 희망모금' 캠페인

아름다운재단 ‘우토로 희망모금’ 캠페인

다행히 <우토로 살리기 모금 캠페인>이 시작된 2년만에 기적이 일어난다. 시민 성금 9억 원이 모이고, 이 열망이 정부지원금 30억 원까지 이끌어낸다. 이제 우토로 사람들은 떠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차별의 땅’이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평화의 땅’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곧 철거될 옛 우토로의 모습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좌) 우토로의 상징 함바, (우) 우토로 시영주택

(좌) 우토로의 상징 함바, (우) 우토로 시영주택

우토로 마을의 낡은 집들은 곧 철거될 예정이다. 시민 성금과 정부 지원금으로 지은 시영아파트로 이주를 이미 마친 사람들도 있다. 그와 함께 역사적 흔적도 빠르게 지워지고 있어 보존이 시급하다. 1945년, 그 막막했던 시기에 우토로 사람들이 함바의 한 구석을 잘라 ‘민족학교’를 세우고 조선의 역사와 한글을 기억해온 것처럼, 이제 우리가 ‘우토로의 역사’를 기억할 차례가 아닐까.

우토로 조선인 학교

우토로 조선인 학교

1938년, 일제는 조선의 물자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총동원’하는 <국가총동원법>이란 반인권적인 법을 만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모두 그 체제 아래 벌어진 일이다. 최태성 선생님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강제징용’ 너머를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토로에 계신 활동가 분이 ‘강제징용’이라는 표현을 지양해달라는 말을 하셨어요. 그와는 다른 결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온 분들도 있다고요.

1938년 일제가 만든 <국가총동원법>은 조선인의 삶을 끝까지 내몰았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살기 위해 찾아갔던 사람들 역시 그 체제에서 고통 받은 민중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강제’라는 말을 붙이면 분노할 대상이 명확해지겠죠. 하지만 감정적인 접근보다는 ‘인권’이라는 입장에서 이분들의 삶을 바라보고 기억했으면 해요. 기억해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세 기부와 재능기부 역사 강연으로 우토로와 함께 하는 최태성 선생님

인세 기부와 재능기부 역사 강연으로 우토로와 함께 하는 최태성 선생님

우토로의 역사를 제대로 남기기 위해서는 <평화기념관> 건립뿐 아니라 구술집과 역사지도, 마을안내서 제작을 비롯해 함바 재건 등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아름다운재단은 <기억할게 우토로> 캠페인(www.beautifulfund.org/utoro)을 진행 중이다. 최태성 선생님 역시 인세 천만 원을 기부하고, 이날 강연을 재능 기부로 진행했다.

이날 강연을 들은 최지성 학생(11세)은 “외워서 시험 보는 역사가 아니라 마음으로 ‘기억’하는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최태성 선생님은 이 학생의 이야기에 응답하며, ‘기억’이란 키워드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맞아요.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해야 역사가 되니까요. 많은 사람의 마음이 모여 우토로에 기억의 공간이 꼭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옛 우토로 마을은 곧 사라지겠지만, 기억하는 일은 이제 시작입니다.”

글 우민정 ㅣ 사진 임다윤

우토로 평화기념관은 기억합니다.

– 일제강점기 아픔의 역사와 해방 후 재일조선이 차별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 한국 시민이 힘을 합쳐 일본 땅 위에 조선인 마을을 살려낸 승리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 한국 시민, 재일동포, 남과 북, 일본 사회를 넘어선 연대의 역사를 기억합니다.
– 우토로 평화기념관은 일본 시민에게 우토로의 역사를 보고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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