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도 아름다운재단은 변화의 시나리오 지원사업의 하나로 어김 없이 [활동가 재충전 지원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예년과 다르게 활동가들의 휴식을 위한 프로그램 이외에 단체 활동과 연관된 [해외연수] 지원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4개의 팀이 선정되어 각기 일본, 독일,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해외 각지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각 팀이 다녀온 연수 이야기, 함께 공유합니다.
먼저 [관악주민연대]는 일본의 We21 Japan, Workers Collective에서 운영하는 각종 지역활동단체를 방문하고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일본 지역운동의 다양한 사례를 경험하여 활동가 개인의 운동적 정체성과 전망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현재 몸담고 있는 지역 풀뿌리단체의 활동방향과 내용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 이야기를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추석이 끝나고 ‘마을축제다, 워크숍이다’ 일이 몰아닥칠 즈음, 어렵게 시간을 내서 일본 연수길에 올랐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제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조차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다행히 연수 일행 모두 예상보다 일찍 공항에 도착했고 부족한 잠을 비행기에서 채우며 일본으로 출발했다.
서울의 다소 쌀쌀한 날씨를 기억하며 긴 옷을 준비한 일행은 하네다 공항을 나서며 풍겨오는 남도 특유의 더운 기운에 이국땅에 왔음을 실감했다. 일본 시민사회단체와 많은 교류를 하고 있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이번 연수를 주관해 줄 We21 Japan 대표 군지 마유미를 만나러 출발했다. 군지상은 한 단체의 대표라는 직함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왜소한 체격에 천진난만한 미소가 인상적인 이웃사람이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천식까지 앓고 있다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해맑은 웃음과 열정을 가진 어머니같은 분이었다.
인사도 잠시, 군지상은 첫 번째 방문예정이던 ‘가나가와네트(Kanagawa Network Movement)’와의 약속시간까지 짬이 있다며 연수 일행을 We21 Japan사무실로 이끌었다. 4박 5일의 연수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배려였다. 또한 입에서 단내가 나고, 입술이 틀 정도로 빡빡한 연수 일정의 서곡이었다.
We21 Japan은 총 36개의 NPO법인이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56개의 재활용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각각의 매장은 위치한 지역 안에서 자원봉사, 재활용제품 후원 등으로 주민들을 조직하고 있는데, 위치가 다른 각 매장간의 상품유통과 교육프로그램, 국제협력, 공동홍보, 정책생산 등의 업무를 본부에서 진행하고 있다. 단체 활동 중 눈에 띄는 대목은 공육(公育)이다. 공육은 일종의 교육프로그램인데, 개인의 작은 실천이 이웃, 지역, 국가, 세계, 미래세대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개인실천의 관계성과 공공성)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실천을 유도하기 위해 교육교재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교재의 전문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대학교수를 자원봉사로 활용하고 있다. 공육의 개념은 ‘사람을 연결하고, 지역이 움직여, 국가를 넘어서 모두가 연결된다’는 단체의 슬로건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We21 Japan, 관악주민연대 서로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군지상은 부리나케 사무실을 나와 가나가와네트로 안내했다. 빠른 걸음으로 반걸음 앞장서 가는 군지상을 좇으면서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저렇게 바삐 주민의 문제를 찾고 사람을 모으고 실천했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어딘지 모를 사무실로 안내받아 들어가니 게시판에 ‘관악주민연대와의 의견교환회’라는 환영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온 연수단을 맞이하는 일본 지역활동단체의 세심한 정성에 놀라고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가나가와네트는 1980년 주민청원 방식의 합성세제추방조례가 현의회에서 부결되면서 만들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식품안전, 환경, 복지 등 생활과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의 변화가 불가피하고 생활의 모든 것이 정치와 관계되어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시민활동의 연장으로서 지역정당 가나가와네트가 설립되었다. 가나가와네트는 일반적인 정당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생활과제의 해결이라는 필요에 충실하고 정치권력화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개호복지(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와 유사) 현장에서 일하는 돌봄노동자(생활인)가 가나가와네트의 정치인이 되고, 최대 8년까지만 정치현장에 있을 수 있으며, 정치활동을 통해 벌어들이는 소득은 지역단체활동의 재정으로 재분배되는 등 정치활동과 지역시민활동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사전 준비없이 선거 때마다 행사치르 듯 대응조직을 만들어 대처했던 그간의 경험을 되돌아 보게 했다.
간담회를 마치고 건물을 나오니 해는 이미 지고 낯선 거리에 낯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연수일정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군지상은 특유의 총총 걸음으로 연수단을 마지막 행선지인 숙소로 안내했다. 숙소에서 우리를 맞이한 분은 다름아닌 군지상의 남편이었다. 정갈한 일본의 2층집 거실에서 먼 길 온 손님을 위해 준비한 군지 부부의 ‘속 깊은’ 환영식이 열렸다. 사실 ‘속 깊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독도, 위안부, 집단적 자위권 등으로 갈라선 두 나라의 정치적 현실이 있지만 민간사이의 우애와 교류가 필요하고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남편 분은 전직 엔지니어였는데, 지금도 그 특기를 살려 마술에 가까운 소품을 만들며 마을과학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직접 만든 태극기 소품도 한국 연수단과의 교류와 우애를 위한 아버님의 세심한 배려였다. 탄성을 자아내는 여러 신기한 소품을 구경하고, 직접 조리한 음식에, 거대한 정종병을 비우며 일본에서의 첫째 날이 저물었다. 일본에서의 어머니(오까상)와 아버지(오또상)를 얻은 날이기도 했다.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아침으로 전날의 여독을 풀고 We21 Japan에서 운영하고 있는 아츠키 매장을 찾았다. 아츠키 매장은 아츠키시 시청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 그런 지리적 유리함이 더해져 수익이나 풍부한 활동 등에서 56개 매장 중 으뜸이다.
아츠키 매장의 기본활동은 재활용제품을 모아 수선하고 판매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지역사람, 세계와의 관계이다. 지역사람과의 관계는 그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주민을 조직해 매장운영에 결합시키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매장을 이용하던 주민이 자원봉사자가 되고 스텝으로 성장한다. 세계와의 관계는 10년간의 ‘WeShop’ 활동을 평가하면서 새로운 활동영역으로 공정무역을 채택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지역에서의 실천이 세계적인 연관성 안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활동 안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한다.
Human Support Network(이하 HSN)는 아츠키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역단체 활동가들의 인적 관계망이다. HSN에는 노인복지, 아동복지시설 등도 참가하고 있는데 이는 HSN에서의 교류를 통해 재정, 정보 등 단체활동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군가 일방적으로 자원을 모아서 나누어주는 방식은 아니다. 각자의 현장활동 경험에서 얻은 지역의 자원이나 필요를 모으고 조직하는 것이 중간지원조직으로서 HSN의 가장 큰 역할이다.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비용과 인력을 거의 쓰지 않고 현장을 잃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또한 유념할 대목이다.
두 단체와의 간담회와 현장 견학을 마치고 나니 다시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오랜 기간 쌓아온 단체활동의 경험과 노하우를 충분히 이해하고 소통하기에는 서너시간의 교류가 너무 부족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막연한 보람과 그에 반해 점점 고갈되어 가는 몹쓸 체력을 느끼며 숙소로 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네 이웃들이 준비한 가슴 벅찬 환영식을 예상치도 못한 채…….
연수 일정을 마치고 도착한 저녁,
잠시 마당을 서성이는데 옆집에서 나온 중년의 부인이 접시를 들고 우리가 머물고 있는 어머니 집으로
들어오더니 ‘곤방와’하고는 접시를 거실에 두고 나가셨다. 잠시 후 앞집에서 나온 중년의 아저씨가
양손 가득 접시를 들고 오시며, ‘곤방와’ 하길래 얼결에 접시를 받아 집안으로 들여놓은 뒤
다시 마당으로 나갔다. 몇 분의 이웃들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몇 차례,
거실에 펼쳐진 상에 온갖 종류의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진 걸 보고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아버지가 손으로 빚은 만두까지,
한국에서도 만나기 힘든 잔치상이었다.
한국에서 온 일행을 위해 잔치상을 직접 마련해 주신 모든 이웃들이 모여 인사하고 떠들며
음식을 즐기는 파티가 진행되었다. 정성이 넘친 음식이라 그런지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즐거운 시간이 이어지고, 마음이 통하기 시작하였다.
연수 일행 중 한명이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민머리 아저씨에게 선물하고,
선물을 받은 아저씨의 부인이 들고 있던 가방을, 부인에게 전해 주라면서 선물하고,
모자를 부러워하던 아버지에게 누군가가 또 모자를 건네고,
모자를 건넨 이가 예쁘다고 칭찬하던 앞치마가 선물로 변하고…
더 이상 전해줄 선물이 없다고 생각될 때 쯤 두 분의 부인이 집으로 가서 자신들이 사용하던
가방 세 개를 가져와 하나씩 선물로 전달하고… 예정에 없던 선물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선물의 기쁨은 여흥으로 이어져 같이 노래하고 춤도 배우고,
같은 춤을 추면서 행복한 이웃들의 파티가 이어졌다.
몇 시간 전에 만난 사람들이 대문을 맞대고 십수년간 정을 쌓으며 허물없이 지낸 가족이 되는 순간이었다.
– 김미경 연수후기 중
글 / 사진 제공 : 관악주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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