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사회문제는 하나의 조직이나 영역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은 다양한 조직이나 영역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협력을 통해 사회문제 해결을 시도할 수 있도록 <변화의시나리오 네트워크 지원사업>(이하 네트워크)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여성들의 연대와 자기역량 강화를 통해 권리 실현을 도운 <인권운동네트워크바람>, 시민들의 생태감수성 회복을 위한 담론과 실천방안을 제시한 <생태-예술-네트워크> 2개 네트워크의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지난 8개월 간 이들이 만든 ‘우리사회를 바꾸는 작은변화’를 전합니다. |
여성+노동+인권 네트워크에서 비영리단체 설립까지
<인권운동네트워크바람>(이하 바람)은 여성운동, 노동운동, 인권운동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명숙, 이혜정, 변정윤, 계영 님으로 구성된 네트워크이다. 멤버들은 최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인 ‘페미니즘’을 어떻게 운동에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바람>은 촛불혁명 이후 이어지고 있는 일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과 실천이 여성의 삶과 노동으로 확장되기를 바랐다.
본 프로젝트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노동에서 자기역량 강화를 목표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 활동을 추진했다. 첫째, <젠더갑질 실태조사>를 실시하여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차별·성폭력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둘째, 다양한 소속의 여성들이 모여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인권선언을 재구성한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바람>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젠더갑질’을 공론화하고,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를 담은 인권선언을 발표하는 등 인권 담론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멤버들은 활동과정에서 만난 여성들의 자기역량 강화를 돕고, 이들과 연대하며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향후 활동을 안정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동명의 비영리단체를 설립했다.
<바람>의 명숙, 이혜정님과 일문일답
Q : 멤버들은 어떻게 만났나? 네트워크를 만든 이유는?
A : 활동하면서 만났다. 변정윤과 명숙은 2014-2015년 <KT직장내괴롭힘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변정윤과 이혜정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명숙과 계영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함께 일했다. 우리는 평소 일상의 차별과 권력 문제를 민감하게 바라보는 인식 틀로서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었고, 이를 어떻게 운동에 담을 것인가 고민하다가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강남역여성살해, 불법촬영범죄, 낙태죄, 미투 등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멤버들의 활동분야나 관심이 모이는 지점인 여성의 삶과 노동을 주제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Q : 올해 <젠더갑질 실태조사>, <페미니즘으로 인권선언 다시 쓰기> 두 가지 활동을 했다. <젠더갑질 실태조사>부터 설명하면?
A : 촛불혁명 이후 직장갑질, 미투가 있었다. 일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런데 여성노동자들은 여전히 직장내 괴롭힘과 성차별·성폭력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작업부터 했다. ‘젠더갑질’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실태조사를 했다. 4개 사업장에 근무하는 여성노동자 43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심층면접을 진행했다. 입직부터 퇴직까지의 과정에서 어떤 차별이나 괴롭힘이 있는지 파악했다. 조사결과는 예상대로이다. 여성들은 업종이나 고용형태와 무관하게 임금, 승진체계, 노동과정에서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었다. 젠더갑질은 특정 사업장의 문제라기보다 노동시장 전반에 만연해있는 구조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Q : 남녀 간 임금격차가 크고, 여성이 채용이나 승진시 불리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이런 실태조사가 없었나?
A : 그렇다. 공공기관에서 실시하는 성별영향분석평가는 임금, 채용, 승진 등과 관련된 통계만 분석한다. 노조가 실시하는 직장내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는 조사범위가 제한적이다. 우리는 당사자 집단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직접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임금, 채용, 승진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경험까지 조사했다. 그래서인지 언론이 많은 관심을 보였고, 여성가족부, 여성단체, 여성학자 등이 보고서를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Q : 조사과정에서 어려움이 컸을 것 같다.
A : 선행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설문 문항을 구성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한번 회의하면 4시간이 기본이었다. 한편 사업장 섭외가 정말 힘들었다. 노조를 통해 사업장 섭외를 시도했는데, 노조들이 관심이 없었다. 젠더 문제가 다른 문제들에 계속 밀렸다. 젠더 문제를 일부의 문제, 부차적인 문제, 이야기하기 불편한 문제로만 여겼다. 그나마 노조 내 여성부나 여성위원회가 있고, 그들의 의지와 파워가 있는 4개 사업장을 섭외했다.
Q : <페미니즘으로 다시 쓴 인권선언>는 어떤 활동인가?
A : 올해는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이다. 유엔이 선언문을 채택한 1948년에는 남성이 보편적 개인을 대표했다. 그 시대의 한계이다. 지금 한국에서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면 권리의 주체와 내용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를 담아야 한다. 작업은 투 트랙으로 진행했다. 여성단체,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페미니즘 운동 역사상 중요한 선언문을 검토하고, 최근의 한국페미니즘 운동을 담아내기 위해 논의했다. 한편 이혜정이 활동하는 강서양천민중의집에서는 강서, 양천 지역의 여성들과 지역 단체들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권리가 무엇인지 논의했다. 이걸 토대로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활동하면서 다양한 여성들을 만났다. 여성들이 모이니까 되게 재미있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했던 여성이든, 그렇지 않은 여성이든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직접 겪은 차별을 이야기하고, 서로 공감대를 형성했다. 나만 이런 줄 알았는데 너도 그랬구나. 우리 함께 바꾸어 보자.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힘을 받은 것 같다. 특히 강서, 양천 지역 여성들은 아예 페미니즘 극단을 만들어 활동을 지속하기로 했다.
Q : 프로젝트 전반에 대해 자체적으로 평가한다면?
A : 젠더 문제를 일부의 문제, 부차적인 문제, 이야기하기 불편한 문제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사람들이 더 이상 모든 문제에서 젠더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페미니즘을 모르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현장이 바뀐다. 실태조사하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미투운동의 영향으로 노동현장에서 성차별 시정 조치가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최근의 분위기 속에서 안 해주면 욕먹을 것 같으니까.
<바람>은 2018년 활동을 통해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실태조사와 인권선언 다시 쓰기 하면서 많은 여성들을 만났다. 우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단체나 노조에 소속된 활동가들은 젠더 문제에 대해 보다 고민하고, 각자의 조직으로 돌아가서 젠더 문제를 우선순위로 올리겠다고 했다. 한 노조는 올해 성평등위원회를 구성하다가 주춤한 상태인데, 내년에 우리에게 같이 붐업해보자고 했다.
Q : 단체 활동에 비해 네트워크 활동은 어떤 장단점이 있었나?
A : 참여 활동가들이 각자의 단체에서 상근하고 있기 때문에 네트워크 활동은 추가업무였다. 퇴근 후 모여 밤늦게까지 회의하고, 수시로 텔레그램으로 소통하고. 그런데 그게 너무 재미있고 즐겁더라. 멤버들의 호흡이 잘 맞고, 서로에게 시너지가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네트워크에서 힘을 받으니 단체 활동에서 힘든 점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있다. 우리는 단체, 노조 등 각자 소속이 다른 여성활동가들과 함께 일했다. 평소 각자의 조직에서 느낀 문제의식이 <바람>이라는 네트워크에서 모인 것 같다. 생각보다 이런 자리가 없다. 다들 흩어져 있다. <바람>에서 문제의식을 나누고, 공부하고, 프로젝트하면서 단체의 틀을 초월한 뭔가 만들어진 것 같다. 앞으로도 더 많은 여성활동가들을 만나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만들고 싶다.
Q : 향후 활동계획은?
A : 올해 활동만으로 끝내기 아쉬워 11월에 비영리단체 등록을 했다.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활동을 이어나갈 수도 있지만, 보다 안정적인 활동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유동성, 확장성 같은 네트워크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단체명에 ‘네트워크’를 그대로 두었다. 페미니즘과 노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내년에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은 두 가지이다. 올해 실태조사에서 아쉬웠던 점을 보완하여 <젠더갑질 실태조사 시즌2>를 하는 것, 여성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등 사회적 소수자의 노동권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Q : <바람>이 만들고 싶은 ‘세상을 바꾸는 작은변화’가 있다면?
A : 우리는 사회적 소수자들, 즉 권력이 박탈된 사람들, 침묵을 강요받는 사람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주변의 지지와 응원이 있어야 한다.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 똑같으면 재미가 없지 않나.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의 구조, 가부장적 구조, 성차별적 구조를 어떻게 약화시킬 것인가 고민하고 있다.
글 | 황선민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