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신도 갑질러 아닌가요?
“직장 상사나 선배가 부하 직원 또는 후배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맡겨진 업무를 마치기 위해 일찍 출근하거나 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회사 대표나 상사의 지시사항은 불만이 있더라도 일단 따르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글을 보면서 ‘뭐, 평범한 직장 얘기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많을 것이다. 이런 일이 워낙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당신도 갑질러일 지 모른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는 이런 문제로 고통을 호소하는 상담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직장갑질119는 아름다운재단 지원을 받아서 ‘직장갑질 감수성 지수’를 개발하고 있다. 사회나 조직의 법제도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갑질을 완전히 뿌리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갑질119는 이미 지수의 문항 초안을 완성했고, 그에 대한 설문조사도 진행 중이다. 조사 내용을 반영해 7월 초에 최종적으로 갑질 감수성 지수를 발표할 예정이다.
뭐가 갑질인지 모르는 갑들… 대안은 성찰과 대화
오진호 직장갑질119 총괄스태프는 “대부분 갑질 가해자는 스스로 자신의 갑질을 인지하지 못한다”면서 “무엇이 갑질이며 어떤 행동을 바꿔야 할지 공론화해야 한다”고 사업 취지를 설명했다. ‘직장갑질 감수성 지수’는 셀프 테스트 형식이다. 그래서 누구나 편하게 자신 또는 상사의 상황을 적용해 갑질 감수성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문항은 총 37개. 한 해 동안 쏟아지는 수만 건의 제보 사례 중 대표적인 유형들을 추린 것이다.
직장갑질119는 문항을 만들면서 너무 세고 뻔한 갑질 사례보다는 ‘내 문제’일 수도 있는 사례를 골랐다. 그래서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항이 참 많다. “잘못을 저지른 부하 직원에게 경위서나 반성문을 쓸 수 있다”는 문항을 들여보다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음… 이런 것도 갑질인가요?” 그런데 오진호 총괄스태프의 말을 들어보니 명백한 갑질이라고 한다. 단순히 상황의 경위를 육하원칙대로 기록하는 수준을 넘어서 개인에게 반성을 강요한다면, 결국 ‘양심의 자유 침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법원 판례까지 나와있다. 자세히 설명을 들어보니 확실히 갑질이 맞다.
직장갑질119 상담 사례 중에서는 상사가 마음에 안 드는 직원에게 트집을 잡아 경위서를 쓰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일부 반노동적인 컨설팅 회사는 아예 “되도록 직원들이 경위서를 많이 쓰게 하라”고 권한다. 이렇게 만든 경위서는 ‘합법적’ 징계와 해고의 근거로 활용되다. 그렇다면 직원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도대체 어쩌란 말일까? 사실 정답은 없다. 직장갑질119 역시 모범답안은 주지 않는다. 직장마다 사람마다 답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당연히 내 생각이 옳다”고 하지 말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면서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갑질의 대안은 민주적인 관계이며, 그 관계는 진지한 성찰과 평등한 대화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오 총괄스태프는 “부서 안에서 함께 ‘갑질 감수성’ 지수를 테스트 하면 좋고, 이 과정을 통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면 더욱더 좋다”고 강조했다. 혼자 테스트해보았는데 점수가 낮다면? “누군가 나 때문에 고통 받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각 문항을 곱씹어보라”고 권했다. 모든 문항이 실제의 생생한 고통에 근거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피해 당사자가 밥줄을 걸고 혼자 싸워서는 안 된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해졌다. 최근 몇 년간 ‘갑질’이 크게 이슈화되었고, 이제쯤 누구나 갑질 문제의 심각성을 알 것 같은데, 왜 갑들은 그토록 자신의 갑질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오진호 총괄스태프는 ‘급격한 변화’를 원인으로 꼽았다. 사회 인식이 바뀌면서 예전에는 당연했던 일이 ‘갑질’로 재평가된다는 것이다. 싫든 좋든 다 같이 회식을 하고 노래방을 가던 것이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이제 좀 바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많은 회사에서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거부한다. 특히 오랫동안 관행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사람은 ‘우리 때는 이것보다 훨씬 심했다’,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상사다’, ‘이런 것도 다 갑질이야?’라고 생각하곤 한다. 자신의 행동은 갑질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갑질은 이렇듯 뿌리 깊은 문제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비민주적 사회문화가 직장 내의 권력 구조와 만났을 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갑질이다. 문제가 크고 깊은데 해결이 쉬울 리 없다. 곧 7월 16일부터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도 시행되지만, 오진호 총괄스태프는 걱정이 크다. 법의 내용이 부실해서가 아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있지만, 처음 시작되는 법이니 제대로 시행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걱정이다. 법 조항만으로는 사회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오 총괄스태프는 “‘더 이상 괴롭히면 안 된다’는 상식이 안착되도록 부대 사업을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나서서 법을 홍보하고 캠페인도 하고 모범사례도 발굴하고 매뉴얼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법도 결국 ‘죽은 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문제를 정부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직장 안에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오진호 총괄스태프는 “갑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직장의 민주성에 대해 계속 질문해야 하고, 사람들이 함께 문제 제기할 수 있는 기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집단적 대응을 강조했다. 피해자들이 혼자 갑질에 대처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갑질하는 상사에게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여러 사람이 함께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모여야 한다. 노동조합도 좋고 직종별 모임도 좋고 노사협의회도 좋다. 피해자가 밥줄을 걸고 외롭게 싸우도록, 더 이상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내 잘못 아닐까’ 자책하던 피해 당사자들… 이제는 달라졌다
직장갑질119는 2017년 11월에 활동을 시작했다. 아직 만 3년도 안된 신생단체다. 그런데 지난 해에만 2만3천여건의 상담을 받았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직장갑질 사례도 발표하고, 갑질 예방 매뉴얼도 만들었다. ‘대한민국 갑질지수’를 만들어 회사들의 갑질 수준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큰 성과를 예상한 것은 아니다. 직장갑질119는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네트워크’와 여러 노동단체들의 프로젝트로 첫발을 뗐다. 촛불집회가 끝난 2017년 초의 일이다. 당시 활동가들은 ‘직장 민주주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광장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민주주의가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긴 토론 끝에 ‘직장갑질 해결’로 방향을 잡았고, 더 많은 직장인들을 만나기 위해서 카카오톡과 이메일로 상담을 받았다. 재원은 아름다운재단 지원을 받아 해결했다.
프로젝트는 시작하자마자 ‘대박’을 쳤다. 갑질 상담과 제보가 그야말로 대폭발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몇 달 정신 없이 이어지면서 활동가들은 자연스럽게 단체 결성을 생각했고, 2018년 초에 비영리 임의단체로 조직구조를 바꿨다. 현재 직장갑질119는 다음 단계를 준비 중이다. 비영리 민간단체로 등록하고 더 안정적인 체계를 갖추기 위해 논의를 하고 있다. 길은 멀어 보이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이런 것도 갑질인가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피해 당사자인데 오히려 ‘내 잘못 아닐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요즘 상담을 청하는 사람들은 “이런 심각한 갑질을 겪고 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제 피해 당사자들은 자신이 겪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피해 당사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깨달았으니, 이제는 변화를 거꾸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적인 직장과 사회는 피해 당사자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권력을 돌아보고 ‘내 권력이 누군가에게 위력이 될 수 있다’고 깨달아야 한다. 동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피해를 겪는 사람 곁에 서야 한다. 그 때서야 진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우리의 갑질 감수성이 더 자라나야 하는 이유,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갑질 감수성 지수’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글 |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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