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열여덟 어른 ‘신선’입니다. 저는 이번에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캠페이너로 참여하면서 다른 열여덟 어른들을 직접 만나 보았는데요. 열여덟 어른으로 살아왔던 우리들이 자립하면서 겪었던 사회 편견부터 정책의 문제까지, 당사자의 시선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
열여덟 어른을 아시나요?
만 18세,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보육원을 나와야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보호종료아동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열여덟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보육원의 보호 아래 생활하던 형범씨였다. 4살 때부터 시작한 보육원 생활이기에 21살이 될 때까지 그에게 보육원은 집이자 사회였다. 퇴소 후 불과 1년 동안 그가 겪은 사회는 어땠는지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Q. 가장 최근에 퇴소를 하게 됐는데. 교육을 받은 게 있나요?
전형범: 따로 교육을 받았던 기억은 없어요. 그냥 퇴소한 다른 선배들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전해 듣는 게 끝이었어요. 퇴소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지원들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고등학생 때 자립 체험을 했던 적은 있어요. 1-2주 정도 시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살아보는 체험이었는데, 문제도 많고, 잘 지켜지지 않아서 중단됐어요. 시설 밖에서 지내다보니까 친구들이 집도 안 들어가고, 이성 친구들을 데려오고 하는 등 관리가 안됐어요.
한번은 시설이 재건축을 할 때여서, 제 또래 남학생들만 5명 정도가 따로 생활을 했었어요. 시설에서는 자립 체험을 같이 시킨다는 의도로 1달 정도를 선생님은 최소한의 도움만 주시고 저희끼리 생활하게 했어요. 저희 입장에서는 너무 좋았죠. 제약이 없어졌으니까요. 통금도 없고, 취침시간도 없었어요. 그런데 항상 누군가 챙겨주던 거에 익숙하다 보니 며칠 만에 바로 힘들다는 걸 깨달았어요.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하고, 밥도 혼자 해먹어야 하니까요. 음식도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매일 라면, 김치볶음밥, 간장밥으로 해결해 먹었어요. 그때 막상 보육원을 퇴소하고 나서의 삶도 두려웠어요.
매달 3만 원만 관리하던 그에게 너무나 큰돈이 주어졌을 때
Q. 시설을 나와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뭐예요?
전형범: 경제관념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던 게 제일 힘들었어요. 시설에서 매달 3만원 정도의 용돈을 받으면서 생활했었는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큰돈을 관리하게 되어서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저축하는 법도 몰랐어요. 저축하는 법을 알려줘도 그렇게 큰돈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관리하겠어요. 저축에 관련된 지식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냥 한 달에 먹고 살 돈이 월급으로 들어오는 돈 200만 원이다라는 생각만 들었어요.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집세로만 매달 40만 원, 식비로 100만 원 정도 사용하다보니 한 달을 200만 원으로 버티자라는 생각이 컸고, 다음 월급날까지 돈이 다 떨어지면 저는 만족했어요. 아 이정도면 내가 잘 버텼구나.
Q. 그럼 자립지원금들은 어떻게 사용한 거예요?
전형범: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선생님들도 알아서 등록금을 내라고만 하셨지 장학금에 대해서는 알고계시지 않았어요. 저도 찾아볼 생각을 못했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700만 원정도 모아둔 디딤씨앗 후원금을 깨서 첫 학기 등록금을 내야만 했어요. 그런데 등록금을 내고나니 500만 원정도 여유가 생겼어요. 20살에 큰돈이 생기니까 일을 해야 하는데도 놀고 돈 쓰기 바빴던 것 같아요. 시설에 살면서 사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를 참아야만 했고, 억눌려있던 욕망이 있었기에 그걸 제어하지 못하고 막 썼어요. 지금은 너무 후회돼요. 그때로 돌아간다면 장학금도 알아보고, 아르바이트 하면서 후원금은 비상금으로 모아뒀을 거 같아요.
그리고 퇴소 후에 받은 자립정착금 500만 원도 허무하게 써버렸어요. 제가 살던 곳은 대구인데 모델 일을 하기위해 서울로 집을 구해 올라왔어요. 그런데 막상 서울에 도착하니까 집이 리모델링을 해야 한다고 해서 1달 정도의 시간을 그냥 하염없이 보내야했을 때가 있었어요. 그때 기분이 너무 막막했어요. 서울에 올라와서 적응하기도 힘든데, 꿈에 대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고, 시간만 보내야하니까요. 시작도 전부터 막히는 기분이랄까. 그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꿈을 내려뒀던 것 같아요. 일단 해야 하는 일인 생계유지부터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거든요.
그래도 올해에 시행된 자립수당(아동복지시설 퇴소 2년이내의 아동에게 매달 30만원씩 수당을 지급)에 신청하면서 조금은 여유가 생기게 됐어요. 이전까지는 월급을 받으면 그 돈이 다 생활비로만 쓰이니까 여가 생활이란 걸 상상도 못했어요. 하지만 매달 30만원의 여유 돈이 생기니까,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가기도 하고, 오랜만에 여행을 다니며 놀기도 할 수 있었어요.
다른 지원제도들을 신청할 때는 너무 복잡한 과정에, 담당자들도 모르고 있어 당사자인 제가 설명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런데 자립수당은 신분증만 들고 동사무소에 가니 간단한 절차로 신청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주변 친구들을 보면, 과정이 복잡해서 지원들에 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거든요. 어려운 과정에 머리 아프니, 그냥 포기하는 친구들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최근에는 자립수당으로 재봉틀을 사고 싶어졌어요. 여유가 생기니까 미뤄두고 있던 저의 꿈을 다시 한 번 꺼내보려고요. 재봉틀을 사서, 나만의 옷을 만들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판매도 해볼 생각이에요.
옷에 대한 유별난 집착, 꿈으로 실현시키다
Q. 그럼 형범씨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건가요?
전형범: 보육원에 살면서 항상 옷을 나눠 입었다 보니, 내 옷에 대한 집착이 심했어요. 간혹 돈을 모아 옷을 사더라도 형들이 뺐어 입기 일쑤였고, 용돈이 적으니까 항상 한정된 예산으로 옷을 사야하는 게 스트레스였어요.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지출의 대부분이 옷을 사는 곳으로 빠져나갔고, 자연스럽게 옷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대학에 진학 할 때 큰 키와 옷에 대한 관심을 살려서 모델학과에 지원했어요.
하지만 무작정 꿈만 쫓아가기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많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모델 일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데,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고, 모든 걸 혼자 해야 한다는 사실에 지레 겁을 먹고 실행에는 옮기지 못한 채 그냥 몇 날 며칠 시간만 보냈어요.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시간만 보내기에는 매달 발생하는 생활비가 만만치 않아 할 수 없이 잠시 꿈을 내려둔 채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현재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을 하면서 생계유지부터 하고 있는 중이지만 마음속에는 늘 하고 싶은 꿈이 있어요. 언젠가는 제가 만든 옷을 사람들에게 입혀주고 싶어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옷을 만들고 싶다는 게 저의 꿈입니다.
늦게까지 누워 있고 싶던 주말이면, 보육원에서는 강제로 교육에 참여시키곤 했다. 경제, 소방 안전교육, 성교육…등등으로 어릴 적부터 많은 교육을 받아왔다. 왜 들어야하는지도 모른 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와 강당에서 억지로 들었던 교육 시간이 보육원 생활 중 가장 최악이었다. 우리는 교육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고, 너나할 것 없이 서명란에 빨리 이름을 적고 방에 다시 들어가기만을 원했다. 그래서일까 기억에 남는 교육 내용은 전무하다. 인터뷰를 거치면서 많은 친구들이 말한다. 교육이 없었던 건 아니라고. 그저 흥미가 없거나, 너무 어릴 때 받아서 기억에도 남지 않는 것일 뿐이다. 시설에서도 아동들을 상대로 한 자립교육은 고민일 것이다.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들이 교육 전문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립에 대한 지식이 뛰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시설 당 자립전담요원은 1명 정도이고, 그들은 많게는 30~40명의 아동을 관리해야한다. 그마저도 인력부족으로 인해 자립전담요원은 다른 행정업무를 병행하며 아동들을 관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근본적으로 자립교육을 위한 전문적인 인력배치가 시급하고, 자립 교육이 아동의 유년 생활 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방법들이 고안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글, 사진 ㅣ 신선 (열여덟 어른 캠페인 캠페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