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의정부시 행복로 일대는 금요일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느 번화가와 마찬가지로 밥집과 술집이 즐비한 곳. 덕분에 거리는 낮처럼 환했고, 시간을 잊은 듯 여기저기서 흥겨운 음악소리가 흘러넘쳤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잡아끈 곳이 있었으니, 바로 행복로 끄트머리에 위치한 디스코 팡팡이다. 마치 놀이동산에 온 듯 신나는 음악이 쩌렁쩌렁 귓가를 울리는 이곳은 흥에 취한 아이들로 인산인해였다. 거리에 유달리 앳된 얼굴이 많았던 이유가 그제야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밤이 더욱 깊어지자 요란한 음악은 사그라졌고, 디스코 팡팡 주위를 맴돌던 아이들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밤늦은 시간이니 모두 집으로 돌아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거짓말처럼 어디선가 아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생님, 배고파요! 라면 끓여주세요!”
한눈에 봐도 중학생, 많아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익숙한 듯 천막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디스코 팡팡 바로 앞에 세워진 천막 안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라면과 과자를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중 몇몇은 천막 옆에 서있는 버스 안으로 발길을 옮겨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냈다. 유흥가 한복판에 난데없이 천막과 버스라니! 이상하게 여길 법도 한데, 오히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천막과 버스를 찾아오는 아이들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부모와의 갈등으로 가출을 고민하는 아이들부터 성매매 등 위기 상황에 노출된 아이들까지, 제 나이를 한참 웃도는 고민을 짊어진 10대 아이들은 이곳에서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의정부시이동청소년쉼터 ‘포텐’은 동트는 새벽까지 천막과 버스 문을 활짝 열고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과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찾아가는 의료상담, 몸을 치유하고 마음의 허기를 채우다
“겉보기엔 여느 또래와 다를 게 없어요.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른들은 전혀 상상도 못할 고민과 어려움을 안고 있어요. 병원이 아닌 거리에서 상담을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절실히 도움이 필요하지만 차마 도와달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정말 많다는 걸요. 특히 거리 청소년들은 혼자 힘으로 병원 문턱을 넘기 어려운데, 그들에게 포텐이 작은 디딤돌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지구덕 한서중앙병원 원장은 의정부시이동청소년쉼터 포텐 초창기부터 거리 청소년을 위한 이동의료상담을 해오고 있다. 지구덕 원장은 그동안 사소한 자극에도 감정이 격앙되며 자살을 시도하는 아이부터, 가족에게 폭력을 가하고 위협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아이까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위 ‘문제 청소년’들의 상담을 도맡아온 청소년 전문가다. 하지만 병원이 아닌 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는 지금껏 그가 마주한 것과는 또 달랐다.
10대 청소년의 가출, 성폭행, 성매매…. 어른들에겐 간혹 신문기사에서나 봄직한 끔찍한 일들이 거리의 아이들에겐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위기 상황에 노출되고, 잘못인 건 알지만 어디서부터 꼬인 매듭을 풀어야 할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미처 구조의 손길조차 내밀지 못한 채 더욱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대다수 어른들이 ‘문제아’라며 손가락질하고 외면할 때 가만히 손을 내밀어주는 곳, 어쩌면 포텐의 천막과 버스는 오갈 데 없고 기댈 곳 없는 거리의 아이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인지도 모른다.
“올 봄인가, 새벽에 긴급 연락을 받고 상담을 진행한 여중생이 있었어요. 한동안 입을 열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포텐 버스 이야기를 꺼냈더니 눈빛이 달라지는 거예요. ‘어, 나도 포텐 가봤는데? 혹시 OO 알아요? 선생님 OO랑도 얘기해봤어요?’ 계속 질문을 쏟아내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더군요. 사실 이런 경우 치료 자체를 거부하는 일이 대부분인데, 이 아이는 스스로 입원을 결정했어요. ‘엄마, 나 다녀올게’ 인사까지 하고요. 포텐 활동이 거리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되고 있는지 다시금 깨달은 순간이었죠.”
꼬박 3년간 한결같은 열정, 아이들의 마음 빗장을 열다
지난 2012년 11월 첫 활동을 시작한 포텐은 야간시간 거리에 있는 청소년들을 직접 찾아가는 ‘움직이는 청소년 쉼터’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 의정부 내 청소년 밀집지역을 번갈아 찾아가며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야외 천막에선 허기를 채울 간단한 먹을거리와 심리상담, 진로상담 등을 진행하고, 좀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한 아이들은 조용한 버스 안에서 상담을 이어간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 포텐 천막과 버스가 등장했을 때 아이들은 멀리서 곁눈질만 할뿐 도통 곁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3년여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들을 찾아오는 포텐의 고집에 아이들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이제는 먼저 기다렸다가 포텐 버스가 들어서기 무섭게 몰려들고, 치과․가정의학과․정신의학과․산부인과 등 다양한 진료과목의 의사․간호사 선생님이 의료상담을 진행하는 금요일엔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그중에서도 지구덕 원장은 손에 꼽히는 ‘인기남’이다. 실제로 취재가 진행되는 동안 ‘10분 내로 상담을 시작하지 않으면 도망가겠다’는 협박(?)이 난무했다. 오랜 거리생활과 위기 상황 노출로 인해 다양한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아이들에게 지구덕 원장은 유일하게 속 깊은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상대인 까닭이다.
산부인과 16년 경력의 베테랑 간호사 정인숙 신여성병원 간호부장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산부인과 관련 상담 봉사만 13년째인 그녀는 올해 초부터 포텐에 합류해 아이들의 성문제 상담을 도맡고 있다. 온갖 문제를 끌어안고 거리를 헤매다 포텐을 찾아온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그녀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다.
“요즘 아이들은 성적 호기심이 많은 만큼 성지식도 상당할 거라고 생각들 하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을 만나보면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르지? 할 정도로 아는 것이 너무 없어요. 정작 중요한 것들, 어떻게 해야 피임이 되는지, 성병을 예방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임신하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등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고 보면 돼요. 실제로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다 포텐 버스를 찾아오는 아이들이 적지 않아요.”
아이를 설득해 부모에게 문제 상황을 알리고 해결방안을 찾도록 돕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적잖은 갈등이 벌어지곤 한다. 그때마다 정인숙 간호부장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최근에도 고1 여학생의 부모님과 함께 상담을 진행했는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부모는 화가 나서 무조건 아이를 윽박지르고,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마음 문을 닫아버리고…. 현장에서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부지기수에요. 다행히 이 아이는 잘 해결됐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최소한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방치 상태에 있어요. 더 많은 아이들이 제때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포텐 활동이 더욱 탄탄해지고, 더불어 더 많은 지역에서 거리 청소년을 위한 의료 서비스가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거리 헤매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희망의 안식처 되어주길
행복로에서 거리 상담을 진행하던 어느 날, 중년의 남성이 천막 사이를 한참동안 기웃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선뜻 다가오진 않는 그에게 포텐을 이끌고 있는 전종수 소장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러자 의외의 이야기가 돌아왔다.
“알고 보니 우리에게 자주 찾아오는 학생의 아버님이더라고요. 아이가 왜 이곳을 자주 찾는지 궁금해서 와보셨대요. 어떻게 아이와 대화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털어놓으시더군요. 처음엔 무척 어두운 표정이었어요. 그런데 한참 대화를 나누고 헤어질 때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 아이가 왜 매번 이곳을 오는지 알겠다고, 앞으로 자신도 노력하겠으니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요.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아이와 그 부모가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 함께 상담을 받은 뒤 다정하게 손잡고 가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정말 보람을 느끼죠.”
전종수 소장을 비롯한 포텐 활동가들은 이날 새벽 4시까지 거리 상담을 진행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반복하는 일상이다. 이유는 단 하나, 더 늦은 시간일수록 고위험군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지원금을 더 받는 것도 아니지만,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더 만나 도움을 주고 싶다는 포텐 활동가들의 열정은 도무지 식을 줄 모른다. 그래서일까. 취재를 마치고 의정부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포텐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이다. 앞으로도 부디 지치지 말고 기댈 곳 없이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희망의 안식처가 되어주길, 못난 어른들을 대표해 간절히 염원해본다.
글. 권지희 | 사진. 김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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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업은 미래세대1%기금을 기반으로 ‘거리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업을 운영하는 단체를 지원합니다.
근이맘
글을 읽는 동안 코끝이 찡해집니다
이렇게 감동적인 분들이 계셔주셔서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beautifulfund
네! 이렇게 멋진 분들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