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는 지속가능한 사회발전을 위한 주요한 동력으로, 사회의 다양한 문제해결, 정부의 공공재 공급의 보충적 역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권리의 옹호, 공론장과 사회적 자본 창출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나 대부분 비영리기반의 공익활동가들은 사회의 발달에 따른 시장과 정부의 대응에 비해 심각한 정보 격차의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공익활동가 해외연수 지원사업은 이들의 활동역량을 강화하고 한국시민사회에 해외시민사회운동관련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여 지속가능한 공익활동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지원사업입니다. 이 글은 2019 공익활동가해외연수지원사업에 선정된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프로젝트팀]에서 활동한 다산인권센터 박진님의 후기입니다 |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2004년 이후 수면 아래로 잠복해 버린 국가보안법(보안법) 폐지 투쟁의 불씨를 붙여보자고 마음먹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면 좋을까,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박물관’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먼저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 버리자”는 취지로 시작되었습니다. 보안법은 특별한 누구를 감옥에 가두는 법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감시하는 법이기도 합니다. 최근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도 국가보안법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박물관을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박물관을 만들 수는 없고, 그럼 무엇부터 해볼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드러나지 않았던 피해자를 드러내는 작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권위원회를 통해 지원을 받아 ‘여성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구술채집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전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를린을 가보는 건 어때?”라는 누군가의 제안으로 다시 베를린 여행이 준비되었습니다.
박물관팀은 구술작가단과 통일운동가, 인권운동가, 법률가 등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최대한 함께 가서 배우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서로간의 역할을 나누고, 최대한 많이 배우고 최대한 많이 갖고 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결심은 연수 기간 내내 치열한 토론으로 이어졌고, 몸은 피곤했으나 많은 것을 양껏 챙겨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모두 팀웍이 다녀진 것은 덤이었습니다.
출발은 베를린 장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흔적이 남고 끊어진 장벽과 장벽 박물관이 주민들이 주거하는 삶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이들의 벽에는 분단을 보여주는 사진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베를리너들이 예술을 일상 속으로 역사를 삶 속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많은 시민들이 방문해 역사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딱딱한 교과서가 아니라 도시 곳곳에 있는 박물관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나라와 사회를 눈으로, 발로 배우고 있었습니다.
원형 그대로 전시한다는 의미보다는 당시의 뜻을 재해석해서 과거를 기억하는 작품들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진 땅에서 바로 이웃한 이들의 사소한 삶이 어떤 비극 속에 놓여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만 모든 역사는 승리의 역사라고 합니다. 서독인의 눈으로 씌어진 역사 이면에 동독인들이 그리는 역사는 어떤 스토리가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국가폭력의 시대를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이 호명되어 그리진 곳이었습니다. 2천개에 육박하는 콘크리트 장벽은 그 크기만으로도 장엄한 광경이었고, 콘크리트 숲에 들어가서 만나는 빛과 그림자는 이 장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리치고 싶은지 다시 깨닫게 했습니다. 유대인 박물관까지 보고 나서 비명과 파괴로 이어진 나치 시대의 폭력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잘 보았습니다. 우리가 만들려는 박물관과 전시가 구현될 방식에 대해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가해자의 폭력을 노출시키지 않는 방식으로도 피해자의 고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를린 북한 대사관까지 걸어갔습니다. 가는 동안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 앞에 도착해서도 별다른 어떤 문제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사관 문 앞에서 우리는 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아닌 것, 그리고 저 안에서 나온 사람과 말을 하는 것과 아닌 것 사이에서 ‘국가보안법’을 만났습니다. 벨을 누를 수 있을까 없을까 오래 토론했습니다. 서로 웃으며 대사관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했지만, 넘을 수 없는 장벽이 한국 땅에서 이토록 먼 베를린까지 이어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역사와 시대에 사라진 개인의 비극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역사를 기록한 슈타지 박물관에서도 가해자의 폭력은 날것대로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사람들을 해쳐왔던 꼼꼼한 기록을 통해 야만을 보여주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폭력의 민낯을 알려주었습니다.
국회의사당은 담벼락없이 넓은 잔디와 함께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가며, 관광객들도 신청만 하면 의사당 내부를 볼 수 있는 장면은 시사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국회 담장 100미터 논쟁으로 민주주의를 소모시키는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과 페르가모 박물관까지 모두 보고 나서, 베를린을 왜 박물관의 도시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 섬에는 야간개장을 보기 위한 시민들이 엄청나게 몰려있었고 예년과 달리 더위가 오래가는 독일의 여름은 우리에게는 너무 더웠지만 베를리너들에게는 햇빛이 주는 가벼운 조증으로 흥겨운 날들이었습니다. 도둑질의 역사를 보고 나온 것만 같았던 페르가모 박물관조차 들떠 보였고, 이 모든 모습이 베를린이겠지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소원은 여유있게 티어가르덴에서 오수를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숲에서 짧은 여유를 가졌습니다. 왜 이곳을 베를리너들의 영혼이 쉬는 숲이라 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베를린 연수의 기간은 짧았지만,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여름은 너무 뜨거웠고, 그들의 역사는 평온해보였지만 우리만큼 격동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 박물관이 언젠가 만들어진다면, 그해 여름 베를린을 다녀온 우리의 기억과 기록을 어느 한편에 작게 기록해두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글,사진 ㅣ다산인권센터(www.rights.or.kr) 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