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일곱 살 때 들은 아버지 이름을 잊을까 싶어서
쉬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아버지 이름밖에 없었으니까요.
술을 마시지 않은 덕에 울퉁불퉁하지만 착한 마누라와 육남매를 얻었습니다.
쉬지 않고 일 한 덕에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나는 1938년생 서지웅입니다.
나는 일곱 살 때 일본에서 대구로 왔습니다. 대구로 올 때가 해방직후였고,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달랑 아버지 이름 석자였고, 나는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무적자였습니다.
내 이름, 내 호적을 찾기 위해 나는 군대에 갔습니다. 나의 뿌리를 찾기 위해 시키는 일은 다했습니다. 그 덕에 무일푼인 나에게 아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내리 다섯의 여자아이와 한 명의 남자아이를 자녀로 얻었습니다.
일이 많아 집에 가지 못하는 일이 잦았고, 돈을 벌기위해 쿠웨이트도 다녀왔습니다. 못 배운 한을 아이들에게 남기지 않기 위해 생선장사. 구두닦이, 차량정비, 개인택시, 야간학교 경비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여섯 남매를 모두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아내는 분식집을 열어 떡볶이를 팔았고, 나는 은행 경비에서 차량정비, 통근버스, 현금수송까지 맡아 이것저것 돈 되는 일은 모두 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일 하는 내 모습을 주변사람들은 인정해주었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좋은 회사에 스카웃도 되었고, 사위로도 삼아주었고, 학자금 대출도 해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에서 지금은 열 한명의 가족이 생기기까지 나는 사람은 모두 똑같고, 공평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원망하면서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원망하는 마음을 죽이기 위해 나는 남을 도우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을 찾고, 호적을 찾고 나니 내가 종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못나가지만 내겐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다음입니다.
은행에서 통근버스를 운전하면서는 대구에 있는 고아원의 여중생과 결연을 했고, 틈 날 때마다 정부미 쌀을 사가지고 방문했고, 통근버스를 이용하는 은행원들에게 부탁하여 안 입는 옷을 가져달라고 부탁해 모은 옷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우유죽을 끓여 교회 옆에서 고아들과 나눠먹기도 했고, 신문 팔아서 양로원에 소쩍새마을에 치약, 칫솔도 보냈습니다. 은행에 오는 손님들 차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닦고 청소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단골손님들이 돈을 주기에 이도 고아원에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넉넉지는 않지만 식구들은 나를 원망 안합니다. 고아로 산 걸 알기 때문에, 고생하며 산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내 마누라는 울퉁불퉁해도 누구보다 착합니다.
92년에는 신장을 기증했습니다. 신장 기증받은 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에게는 미싱이 한 대 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제법 큰 양복점을 한 적이 있는데 망하고 병까지 얻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찾아가봤더니 수선가게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30만원을 주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 찾아갔을 때는 100만원을 주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갈 때마다 주머니에 있는 것을 탈탈 털어주고 나옵니다. 요즘 신장이 안 좋아서 근처 대학병원엘 다녀왔습니다. 병원 다녀오는 길에 시신기증도 하고 왔습니다. 신장 이식한 것도 후회 절대 안합니다. 몸도 다 탈탈 털어버리고 갈려고 합니다. 후회는 절대 안합니다.
2005년도에 도로변 공중전화부스를 청소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다마스가 있어서 그걸 타고 550대의 공중전화를 종일 청소하면서 다녔습니다. 왕복 120km, 공중전화부스를 청소하다보면 하루에도 수천 번은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어느 날 LG카드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마일리지가 많이 쌓였는데 사용하시지 않겠냐며 무언가를 받을 수도 있고, 기부도 할 수 있다고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차량이동이 잦아 LPG충전을 장애인복지카드로 쓴 게 생각보다 많이 마일리지가 쌓였던 거였습니다.
예전에 TV를 보는데 인자한 모습의 박원순 변호사님이 나와서는 아름다운재단을 소개하면서 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던 게 생각이 났습니다. 또 예전에 일본에 재일조선인들을 돕는 활동을 하던 게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겠다고 했던 게 지금까지 인연이 되었습니다. 근데 다른 복지단체보다 신경은 덜 써요. 자동이체 되니까 뭐 신경을 쓸게 있겠어요. 그래도 그 이후로 박원순 변호사님이 하느님 다음이 되었어. 너무 좋아 보여요. 내게 나눔은 그냥 “할 수 있는 것”이에요. 내 신조가 “할 수 있으면 하는 거다”예요.
-취재를 마친 후
서지웅님의 나눔과 함께한 희노애락을 다 전해드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 분의 웃음과 눈물과 원망과 회환의 전 생애 중 아주 작은 부분을 들은 것뿐이지만, 몸도 마음도 이웃을 위해 다 털어내고도 행복해하는 서지웅님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은 덕에 기억력이 좋다면서 꼭 연월일을 거론하시며 처음 결연기부를 했던 중학생 소녀에 대한 추억에서는 눈물을, 독거노인 말벗봉사를 할 때 다녀가던 멀쩡한 아들들에게는 원망을, 보건복지부장관에게 받은 표창과 장기기증 수기책에서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살아온 세월이 평탄치는 않았지만 나눔으로 원망도 없애고, 욕심도 없애고, 얻은 것이 더 많다며 막내아들 나이의 제가 돌아서는 내내 너무 깊게 고개를 숙이시는 모습에 죄송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신장을 기증하고 나중에야 신장이 안 좋아 진 것 때문인지 얼굴이 많이 부어있어 사진이 신경 쓰인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안경을 벗을까?’라며 물으시는 천진난함까지, 탈탈 털어낸 마음에 가득 채운 사람에 대한 사랑이 만들어낸 나눔의 희로애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글 | 서경원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