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하듯 시작한 그림, 진로가 되다
“어릴 때부터 그림이 좋았어요. 낙서하듯 빈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림을 그렸죠. 그러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미술학원에 다니게 되었어요. 호기심 반, 의구심 반으로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차민 씨는 다양한 미술장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안목을 키워갔다. 국내 유수의 미술옥션에서 유명 화가들에게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림에 대한 잠재력을 일깨워 준 시간은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런데도 미술을 진로로 정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돈이 많이 드니까.
“재미로 하는 정도면 괜찮지만 그 이상은 어렵지 않을까. 제대로 하려면 많은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불가능했으니까요. 그게 현실이라고 저도, 주위에서도 그렇게 여겼어요.”
재능이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빛을 발한다고 했던가. 중학생 1학년 어느 날. 몰래 낙서를 하고 있는 그를 담임 선생님이 불러냈다. 혼나겠구나 싶어 긴장한 순간, “그림 그린 거 있으면 싹 다 가지고 온나.”
선생님은 차민 씨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응원과 관심을 쏟아주었다. 그가 공업고등학교를 선택한 이후에도 미술의 끈을 놓지 않은 건, 모두 중학교 은사님 덕분이었다. 여러 장학 지원과 미술 대회도 감각을 키워 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차민 씨는 오랜 고민 끝에 취업 대신 미대 입학을 선택했다.
“보호종료 후 생활을 꾸리려면 취업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가슴 뛰는 일을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 저를 도와주신 분들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컸고요. 합격 통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기분 좋은 성장을 경험하다
모든 게 순조로운 듯했다. 실력이 있으니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국가장학금으로 등록금은 충당했지만, 주거비와 생활비, 학업을 위해 필요한 재료비 등은 스스로 벌어야 했다. 배달, 학원 강사, 서빙 등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하루 2시간도 자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몸이 피곤하니 마음도 금세 지치더라고요. 학과 공부에도 소홀해졌고 한 학기 만에 성적이 떨어져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어요.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정말 막막했어요.”
그의 상황을 알게 된 기관 선생님이 아름다운재단 대학생 교육비 지원사업을 소개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원했고, 선정되자마자 등록금부터 해결했다. 숨통이 트였다. 일상은 여전히 바빴지만 마음은 여유로웠다. “학교생활에 집중할 수 있게 되니 살 것 같았어요. 저를 믿고 뽑아주신 분들께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
2019년에 이어 2020년에도 아름다운재단 대학생 교육비 지원사업에 도전했다. 스치듯 지나갔던 프로그램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팀 활동이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어요. 작은 사회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에요. 다시 선정된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었어요.”
결심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차민 씨는 작은변화 프로젝트의 리더를 맡았다. 10명의 팀원과 함께 버킷리스트와 꿈을 테마로 하는 책을 만들었다. 생각이 다른 이들과 합을 맞춰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배움의 농도는 짙었다.
“각자 사는 곳이 달라 전국 곳곳을 옮겨 다니며 회의를 했어요. 힘든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열심히 책을 만들었죠. 사소한 갈등도 있었지만 문제가 되진 않더라고요. 제가 리더를 맡긴 했지만 모두가 리더였다고 생각해요.”
책이라는 매개로 만난 이들은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부산으로 워크숍을 갔었어요. 밤바다를 걸으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위안을 얻었어요. ”서로를 배려하고 응원하는 마음은 나눈 경험은, 건강한 에너지가 되었다.
새로운 길을 향한 신호탄
차민 씨는 변했다. 함께 하는 즐거움을 배웠고,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림에 대한 열정도 더 커졌다. 어렵게 들어갔지만 한 쪽 발만 걸치고 있었던 학교생활도 적극적으로 즐기게 됐다. 재료비 걱정 없이 작업할 수 있다는 환경의 변화 덕분이다.
“좋은 재료가 좋은 제품을 만든다고 생각하는데 재료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할 수 있었거든요. 내년 졸업 작품전 재료도 어느 정도 구비해 두었어요. 특히, 3D 프린터는 든든한 서포터가 되어줄 것 같아요. 저만의 개성을 담은 작품전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차민 씨에게 아름다운재단 대학생 교육비 지원사업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과 같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느끼는 기분 좋은 긴장감, 정해진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는 시각, 다른 곳으로도 갈 수 있는 용기를 준 신호탄이요.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돼요.”
아직 정확한 진로를 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업만을 고집하던 마음이 바뀌었다. 취업을 해 제품 디자이너로 사회경험을 쌓은 뒤 도전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리저리 부딪히며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
“제 아이디어가 담긴 제품들을 세상에 선보일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레요. 언젠가는 저만의 브랜드를 만들 수도 있겠죠. 그 때까지 부지런히 움직여볼 생각이에요. 요즘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요즘 저를 보면 ‘철들었다. 너.’ 하고 놀라세요.”
어떤 제품들을 구상하고 있냐는 질문에 차민 씨는 거침없이 스케치를 선보였다. 시원스런 그의 그림 속 제품들이 우리의 눈앞에 놓일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인터뷰 마치며 그는 힘든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어진 기회와 지원이 많지 않으니 스스로에게 야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거 이해해요. 하지만 실패라는 연습 없인 성공의 경험도 없어요. 실패가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는 걸 믿고,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단단해지자고요. 우리.”
글 김유진ㅣ사진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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