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주인공이 달라진다. 범죄 현장에선 대개 가해자가 주인공이다. 범인을 잡아 사건을 해결하려는 수사관의 의지 때문이다. 가해자를 중심으로 상황이 흘러가면 피해자는 시선 밖으로 밀려난다. 자신을 둘러싼 폭력과 불안, 고통이 난무하지만 피해자는 그 처참함을 호소하기 어렵다.
아름다운재단과 한국범죄피해자지원중앙센터가 2007년부터 진행 중인 범죄피해자및가족지원사업이 존재하는 이유다. 범죄 피해자와 가족, 그들이 형사 사법의 ‘잊힌 존재’가 되지 않도록, 그 상처와 아픔을 함께 한다.
사건 해결 중심이 부른 피해자 소외
“대검찰청에 따르면 연간 250만 건의 범죄가 발생하고 그 중 강력사건은 26만 건입니다. 한 시간에 30건, 하루에 712건 꼴이죠. 2013년만 해도 5대 강력범죄, 이러저러한 범죄로 발생하는 피해자가 하루 601명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피해를 국가로부터 지원받는 이들은 2%에 불과한 6,000명 정도에 불과하죠. 분명 법이 정한 바에 따라 국가로부터 구조 받을 수 있음이 헌법에 명시돼 있으나 범죄 피해자 지원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2005년부터 10여 년 동안 범죄 피해자를 위해 고군분투한 한국범죄피해자지원중앙센터 이용우 이사장. 그는 이런 구조에서는 범죄 피해를 개인의 탓으로 넘기는 일 또한 비일비재다고 강조한다. 운이 없어 당했거나 심지어 당한 사람이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편견을 덧입혀 보상은커녕 상처를 헤집는다고. 종국엔 피해자가 숨어 지내게 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만든다. 개인이 저지른 범죄라 하더라도 국가 형법에 따라 처벌되듯, 범죄 피해자 보상이 국가의 당연한 책임이라는 원칙이 지켜지도록 하는 것. 이는 한국범죄피해자지원중앙센터 태동의 근간이 되었다.
“2004년 법무부에서 범죄피해자 인권 단체를 꾸려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진짜 억울한 사람들이었죠. 꼭 필요하다, 생각하니 결심이 섰고, 제 돈은 물론이고 친구, 친지, 후배에게 기부금을 받아 2005년에 한국범죄피해자지원중앙센터를 발족했습니다. 그때부터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서울청년회의소’에서 독거노인과 보육시설아동을 대상으로 15년 동안 봉사활동을 펼치는가 하면, 검찰청 중앙지검의 제안을 받아 조건부 기소유예 청소년 선도위원으로 13년을 지냈던 이용우 이사장이었다. 소외된 이웃을 위해서라면 누구보다 앞서 움직인 그조차도 미처 범죄피해자를 상상하지 못했다. 한시라도 빨리 범죄피해자를 위한 지원 서비스를 체계화하고 싶었다. 이 이사장이 사비를 들여가며 해외 범죄피해자 지원 단체를 견학하기 시작한 이유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과 일본, 네덜란드, 영국 등을 찾아가 선진국의 범죄 피해자 지원 정책과 프로그램을 경험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09년, 미국 유타주 아리조나 피닉스에서 매년 열리는 ‘NOVA 컨퍼런스’* 에 참여해 범죄피해자와 관계자 1천여 명과 함께한 4박 5일입니다. 트라우마 해소를 위한 훈련기법, 살인피해자 외 50가지 유형별 피해자 치유의 효과적인 방법 등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스턴트맨의 꿈을 이룬 성폭력범죄피해자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모습에 감동 받았습니다. 한국에도 이런 롤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 North American Victim Assistance Conference 미국피해자지원연합회 총회. 1975년 설립된 NOVA는 미전역에 5,500여개 산하 단체를 두고 있으며 범죄피해자를 직접 지원하거나 정책을 제안한다. 슬로건은 Victorious! The Journey Continues이다.
범죄 피해자를 위한 가장 큰 지원, 관심
강력범죄에 노출돼 패닉인 상태에서 외면과 질타, 편견으로 제2차•제3차 피해를 입는 범죄피해자. 그들에게 신뢰는 회복하기 어려운 정서다. 사건을 겪지 않은 누군가가 “당신의 돕기 위해 고통을 이해하고 싶다”고 다가올 때 범죄피해자가 “당신은 이 고통을 모른다.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뒤로 물러서는 건 자연스러운 저항이다. 그래서 이용우 이사장은 ‘건강을 되찾은 당사자’가 절실하다고 이야기한다. 황산테러로 새까맣게 탄 심신을 치유하고 상담심리학을 공부 중인 권선영 씨(가명)와 뻑치기로 아버지를 잃었으나 지원과 지지로 절망을 지나간 명문대 심리학부에 입학한 이영호 씨(가명)는 그 자체로 희망이다.
“범죄피해자가 다시 사회인으로 웃고 지낼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 일이라고 늘 되새깁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상담을 통한 실질적인 도움, 다양한 방안을 조사, 수집하고 정책에 반영하도록 활발히 건의하고 있습니다. 범죄 피해자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 세미나 결과를 출판물로 제작해 널리 홍보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전국에 58개의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생겨났다. 각 지방 검찰청과 연계된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상담부터 법정 동행, 범죄 현장 정리 등을 운영하며 범죄 피해자 인권 보호와 지원을 위해 발로 뛰고 있다. 법률구조공단 및 전국 400여 개 의료시설과 업무 협약 체결하고, 범죄 피해자에게 가장 필요한 법률·의료서비스 지원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다. 19억여 원의 정부 예산. 턱없이 모자란 재원을 지방자치단체와 일반 기업, 개인 기부금 등으로 충당하고 있지만, 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분산 지급하다 보니 늘 자금이 부족하다. 안정적인 기금 확충이 어려우면 체계적인 지원도 힘든데, 과거 피해자들까지 소급해 지속적으로 지원하려니 난항일 수밖에. 강력범죄 피해자일 경우 정상적인 경제 활동이 어려워 치료비 지원뿐 아니라 기초생활비까지 지원해야 하는데 현실은 씁쓸하다.
성숙한 시민이 밝힌 사각지대
한국범죄피해자지원중앙센터는 그나마 사정이 좋아 법무부 지원 3,000만 원에 후원금 등 3억여 원의 예산을 확보했지만 이 역시 충분하진 않다. 그래서 아름다운재단의 ‘범죄피해자 및 가족지원사업’이 고맙다. 2007년부터 한국범죄피해자지원중앙센터와 파트너십을 이뤄 올해까지 9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한 이 사업으로 많은 피해자들이 기운을 차리고 있다.
“트라우마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생계비 지원 조건은 다소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재단 기금으로 기초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 기부를 하고 계신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한 맺힌 이들을 두려움 없이 위로하고 안아주는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마치 수호천사 같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 그 깊고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껴안은 숱한 범죄 피해자들이 사회의 눈을 피해 숨어 살고 있다. 이 이사장은 아마도 10만 명은 족히 될 것이라고 추산한다. 그에게 아름다운재단 기부자는, 세상이 안전하고 자기는 가치 있으며 세계 질서에 의미가 있다는 신념이 깨진, 바로 그 범죄 피해자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이끌어주는 등불이다.
사실을 넘어서지 않는 사람이 사실에 이르지 못하듯, 사회가 치유에 나서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공동체로서 의미를 잃을 것이라 덧붙였다. 하지만 사회가 방치한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이들이 있는 한, 진정한 인권을 실천하는 성숙한 시민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무관심한 국가를 변화시키고 범죄 예방까지 이끌 힘, 더 많은 이가 그 주체가 되어줄 것을 믿는다.
글 우승연 | 사진 임다윤
[미연이의수호천사기금]은 강력범죄 및 아동대상 범죄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돕고자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피의자에 대한 신변보호와 인권에 대한 논의는 많이 되어 왔지만 정작 끔찍한 범죄로 남겨진 범죄피해 당사자, 가족의 고통과 어려움은 어루만져지지 못하고 있음에 아픔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