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여행은 기대와 설렘을 주는 일이다. 여행, 하면 고생이 떠오를 정도로 힘든 일도 만나겠지만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그 고생이 나를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여행은 더욱 그렇다. 단 한차례의 경험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고, 어떤 여행의 경험을 가지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가 달라지기도 한다. 2001년 첫걸음을 뗀 청소년 자발적 여행활동 지원사업 ‘길 위의 희망찾기’ 지원사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임종화 배분위원(좋은교사운동)과의 만남을 통해 여행으로 삶의 퍼즐 조각을 맞추며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공부보다 값진 여행
2012년부터 5년 동안 청소년 자발적 여행활동 지원사업 ‘길 위의 희망찾기’ 배분위원으로 활동해온 임종화 선생님. 그는 청소년 모두가 제 삶의 퍼즐판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태어난 순간 부모가 쥐어주는 퍼즐판이 있는가 하면, 성장하면서 스스로 거머쥐는 퍼즐판도 있다. 첫 퍼즐 조각을 맞출 때부터 완성된 그림을 알고 있기도 하고, 조각을 찾아 맞춰가며 한발 한발 전체 그림에 다가가기도 한단다. 운이 좋다면 모든 퍼즐 조각을 노력 없이 부여받지만, 평범하다면 절반 이상의 조각을 자신의 힘으로 얻어야 할지도 모른다. 몇 안 되는 퍼즐 조각만 겨우 쥔 채 제게 어떤 그림이 주어졌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으며, 간혹 자신의 퍼즐판과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이 전혀 달라 혼란 속에 놓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자원 속에서 제각각의 삶을 그려내는 아이들. 20여 년 동안 사회 선생님으로 지낸 임 배분위원은 언제나 그들의 퍼즐 맞추기를 응원한다. 청소년기에 경험하는 그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차별 없이 정성껏 지원하려고 노력한다. 그 맥락에서 ‘여행’은 임 배분위원이 생각하는 최고의 지원이자 응원이다. 여행은 다양한 퍼즐 조각을 획득하는 수단이자 퍼즐판의 완성된 그림을 찾아가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여행의 중요성을 알리고 싶어요. 우리 아이들은 공부에 치어서 그런 경험 못하잖아요. 그건 사회적으로도 큰 낭비이고 아이 인생에도 좋지 않아요. 이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알파고 시대인 미래에는 틀에 박힌 공부가 그다지 유용하지 않아요. 자발적이고 다양한 경험, 이를테면 본인 스스로 기획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여행이 훨씬 의미 있는 공부입니다. 돈 주고라도 해야 할 경험인 거죠.”
타인이 짜준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무수한 가능성이 열릴 터였다. 가지 않는다면 폐허가 된 채 닫힐 그 길, 그 위의 희망이었다. 그래서 임 배분위원은 ‘길 위의 희망찾기’가 반가웠다. 낯선 여행길에서 만난 동행자인 양 소중했다. 청소년의 무기력한 일상을 다독이기에 썩 괜찮았다.
경험의 격차가 꿈을 규정한다
‘길 위의 희망찾기’ 사업 초장기엔 상대적으로 여행의 기회가 적은 대상에 집중했다. 그때만 해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다. 한데 해를 거듭할수록 ‘자발성’이 중요한 축으로 부각됐다. 물질적 지원뿐 아니라 건강한 삶을 설계하기 위한 문화적 지원에 관심을 뒀다. 청소년이 주체인 자유로운 경험의 장으로서 ‘길 위의 희망찾기’가 존재하기를 바랐다. 자연스럽게 아동청소년이던 대상이 청소년으로 변화했고 기획 능력이 부족해서 주저하는 단체를 위한 비기획부문 멘토링 제도를 신설했다.
여타 사업과 달리 ‘길 위의 희망찾기’는 대상의 욕구에 따라 융통성 있게 움직였다. 청소년이 여행을 매개로 마음껏 꿈꿀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매해 변화를 가졌다. 임 배분위원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최종 승인 심사 사인만 하다가 3년 전부터는 실제로 심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여행활동인데다 자발적이기까지 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굉장히 설레는 일이었다.
“서류심사를 통과하면 아이들이 직접 와서 PT를 해요. 얼마나 자발적인지 확인하는 순간이죠. 그때 종종 딜레마에 빠지곤 해요. 여행 못 간 소외된 청소년에게 기회를 주는 것과 청소년이 스스로 여행할 수 있음을 사회에 보여주는 것이라는 우리 목표가 충돌할 때가 있거든요. 자발적이고 진취적인 아이들은 이미 여행 경험을 많이 한데 반해 여행을 가본 적이 없는 친구들은 수동적일 때가 많으니까요. 보완하기 위해서 멘토와 함께하는 비기획 부문을 뒀지만 늘 더 나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지점이에요.”
우리나라 청소년의 문제를 공부의 격차보다 경험의 격차라고 생각하는 임 배분위원이기에 이 딜레마는 무겁다. 심사할 때마다 그 증거를 확인하는 게 씁쓸하다. 그럴 때마다 급식을 지원하고 국어, 영어, 수학을 더 잘하라고 장학금이나 등록금을 주면서도 여행이나 문화생활 지원에는 인색한 사회 전반의 인식에 한숨이 절로 난다. 계층 간 문화 경험의 차이가 결국 아이들의 꿈꿀 권리를 등급화하고 그 미래마저 규정짓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길 위의 희망찾기’ 사업이 하루 빨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기를 염원한다.
“청소년의 자발적 여행이라고 하면 엄한 데 가려는 계획이나 세우겠지, 가서 사고 나면 어떡하나, 같은 쓸데없는 걱정이 끊이지 않을 테죠. 그래서 우리 ‘길 위의 희망찾기’ 사례가 중요합니다. 보여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는 걸. 경험의 차이가 아이들의 꿈을 한정짓고 빈약한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메시지도요. 공론화시켜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공공지원으로 확장되기를 바라요.”
위험과 모험 사이의 여행 – 청소년에게 여행 권하는 나라
임 배분위원은 청소년들 간의 문화 경험 출발선을 맞추기 위해서 두 축의 해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공교육과 복지 차원에서 음악, 미술, 공연 등을 접할 수 있는 바우처 제공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학기제와 청소년 여행 인프라 제공이다.
“방학 때 청소년들에게 무료 기차여행 티켓을 준다든지 저렴한 지정숙소를 마련해 주는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거예요. 실패가 과정이고 싸움도 갈등해결 방법 중 하나라는 걸 비롯해 다양한 자극을 경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여행이에요. 왜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꿈이 없을까 궁금하시죠? 생각해 보세요, 독서실 칸막이 안에서 어떤 꿈을 꿀 수 있을지.”
그 때문일까.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단체는 러시아 여행을 기획했던 어느 대안학교 청소년이다. 대개 지원금에 맞춰 국내나 일본과 대만, 동남아를 다녀오는 데 비해 그들은 그어놓은 한계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었다. 자원에 맞춰 제 꿈을 자르지 않는 아이들은 그를 가슴 뛰게 만들었다. 모험과 위험, 무모와 패기를 구분할 줄 아는 듯 느껴져 마음이 뿌듯했다.
“아이들과 달리 사회의 인식은 세월호 이후에 최악의 상황이 돼버렸어요. 어른들은 책임이 무겁고 무서우니 여행을 안 보내려고 하죠. 한 번 가려면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요. 가지 말란 얘기예요. 하지만 세월호가 여행의 문제였나요? 왜 아이들을 더 묶어두는 상황으로 만드는지…. 위험 상황에서 스스로 위험을 감지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건 여행에서 배우게 됩니다.”
청소년의 자발적 여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어른들의 책임과 의무가 뒤따른다. 권위와 통제를 버리고 낭떠러지 곁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존재할 때 청소년은 비로소 제 삶의 퍼즐판을 제 속도로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모자라는 건 찾아가고 어려운 건 쉬어가고 혼란스러운 건 바꿔가며 그림을 완성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열어놓은 길 위에서 희망의 퍼즐 조각도 찾으리라 믿는다. 그 희망을 뒷심 삼아 미래도 펼칠 테다. 그것이 해를 거듭하며 변신하는 ‘길 위의 희망찾기’의 바람이자, 오랫동안 청소년을 만나온 임종화 배분위원의 축원이다.
글 우승연 ㅣ 사진 임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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