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기구한 삶’이었습니다. 13세에 동생 둘 딸린 고아가 되고 17세에 중국으로 팔려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받고 해방 이후에도 갖은 수모와 고난을 겪었던 김군자 할머니. 할머니는 늘 “나처럼 부모 없는 이들이 돈 없어 배우지 못 한 설움을 겪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0년 8월, 드디어 할머니는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자신이 평생동안 모으신 돈과 국가에서 나온 보상금 등 전재산 5천만원을 모아 <김군자할머니기금>이라는 아름다운재단 제 1호 기금을 조성하신 것입니다.
“맑은 정신일 때 기부를 해놓아야 할 것 같아 가져오긴 했는데, 너무 적은 돈이라 미안합니다.”
아름다운재단은 김군자 할머니의 뜻을 받들어 2001년부터 아동보호시설퇴소(아동복지시설, 가정위탁 보호/보호종결) 대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6년 9월 24일. ‘대학생 교육비 지원사업’ 장학생들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생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활시설인 ‘나눔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살고 계신 할머니들을, 특히 <김군자할머니기금>의 주인공 김군자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나눔의 집’ 소개 영상을 관람했습니다. ‘나눔의 집’은 1992년 기본 생계마저 어려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자는 취지로 사회 각계에서 벌인 모금운동을 통해 서교동에 처음 세워졌고, 이후 명륜동, 혜화동을 거쳐 1995년도에 현재 위치인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상을 관람하기 전, 나눔의 집 간사님께서 장학생들에게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한일 ‘위안부’ 합의의 문제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민지가 손을 들어 답했습니다.
“과거사에 대한 인정과 그들의 만행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은 건데, 양국 모두 할머니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눔의 집 간사님은 “맞다. 할머니들은 명예회복을 원하나 일본은 사과 없이 보상금이 아닌 위로금 명목으로 과거를 정리해버리려 한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라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할머니들을 만나 선물로 준비해온 스카프와 간식을 전달했습니다. 할머니들은 손주뻘 되는 학생들이 직접 목에 감아주는 스카프에 웃음 지으시며 손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할머니들께 선물을 전달 한 후 목욕봉사, 생활관 청소, 위안부 역사관 청소 등 본격 봉사활동이 이어졌습니다. 할머니들이 목욕하시는 사이 침대 시트를 갈고, 목욕을 마친 할머니들에게 옷을 입혀드리고 로션을 발라드리기도 했습니다. 다들 늦더위에 구슬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을 내자 “어린 학생들이라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했는데 너무 잘해줘서 일을 덜어주었다”며 ‘나눔의 집’ 활동가분들이 칭찬해주었습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생활관 옆에 있는 위안부 역사관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위안부 역사관은 잊혀 가는 일본의 전쟁 범죄행위를 고발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그리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전시관은 증언의 장, 체험의 장, 기록의 장, 고발의 장, 추모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조용히 관람하는 가운데 숙연함과 비통함이 흘렀습니다.
마지막 순서는 김군자 할머니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세평 남짓한 작은 방에 장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으니 방이 꽉 찼습니다.
“난 고아야. 못 배웠거든.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생기지 말라고 한푼 두푼 모아서 장학금으로 줬지”
“돈이 없어서 새 옷을 못 입었어. 시장에서 남들 입던 옷 사다가 입었지!”
할머니의 방문 앞에는 박사 가운을 입은 할머니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 “기부 박사”라는 타이틀이 붙여져 있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신 할머니에게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트모양 종이에 장학생들이 쓴 편지를 모아 예쁘게 코팅해서 드리자 할머니는 멋진 포즈를 지어주셨습니다. 할머니는 귀가 조금 어두워지셨지만, 장학생들이 할머니에게 맞추어 큰 목소리로 건네는 얘기에 재미있게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라고 그러잖아”
노란 머리를 한 장학생에게 “미국 사람이 왔네”라며 농을 치십니다.
나이가 스물셋이라고 한 여학생에게는 “빨리 시집가서 좋은 사람 맡아야지”라고 훈수를 두십니다.
“저번 설에는 대학 나온 아름다운재단 학생들이 셋이 왔어. 마후라랑 잠바를 사 왔어. 잠바는 작아서 다른 사람 줬지. 한 사람은 결혼했다고 부인하고 같이 왔어“ 자식 같은 장학생들은 할머니의 가장 큰 자랑입니다.
“동생도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시집가서 아들 며느리 보고 편안하게 살았어. 그게 좋아보이더라구”
평범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지내 왔던 한 많은 삶, 하지만 작은 방안을 가득 채운 장학생들 그리고 ‘대학생 교육비 지원사업’을 통해 지금까지 지원받은 440여 명의 학생을 떠올릴 때 김군자 할머니는 세상 누구보다 많은 자녀를 둔 큰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적 문제와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여유와 인간으로서 주체적 선택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할머니,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기금 덕분에 배우고 싶은 과에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어요. – 김군자 할머니께 드리는 장학생의 편지 中 |
장학생들의 ‘나눔의 집’ 방문 후기 (요약)
가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인생은 너무도 불공평한 것이라고,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라는 말은 인생을 편히도 살았던 사람들이 하는 뭣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지난 학기 학점이 4.13이었다. 원래부터 학점이 좋았냐고 물어본다면 1학년때 학점은 2.75였다. 일주일 동안 안 먹고 안 자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장학금 꼭 받아야 하는 거야?’라고 묻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히려 반대였다. 학비 걱정 없이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 할 수 있었기에 모든 에너지를 학업에 쏟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모든 후원에 감사 했지만, 이번 장학금과 봉사활동은 나에게 의미가 남다르다. 나를 지원해 주신 분을 내가 봉사활동을 가서 씻겨 드리다니, 책에서 글로 배운 많은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 석OO
아픈 배경이 있는 곳에 내가 간다는 생각을 하니 우선은 숙연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말 감사했던 것은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도움을 받으신 것을 잊지 않으시고 다른 어려운 분들에게까지도 도움의 손길을 주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김군자 할머니의 기부로 조성된 기금의 도움을 받아 많은 경험을 했지만 그 외에도 다른 할머니들도 기부하시고 시설에서 봉사도 하시는 걸 봤다. 그렇게 서로서로 아픔을 나누는 모습이 너무 따뜻해 보였다. 김군자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오셨던 것이 느껴졌다. 많은 고생을 하셨으니 이제는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눔의 집에서 봉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왔다. 다시 방문했을 땐 할머니들이 조금 더 행복을 느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 김OO
나눔의 집은 과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던 할머니들이 계시는 곳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과거만의 일이 아니며 현재까지 문제가 계속 다뤄지는 문제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눔의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부터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우리가 봉사하는 동안 할머님께서 자주 말을 걸어주셔서 무지 감사했다. 나는 걸레로 바닥을 닦았는데 집이 상당히 넓어서 옷이 땀에 젖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 후에 김군자 할머니를 뵈었다. 농담을 좋아하셨고 칭찬에 약하셨다. 할머니께 너무 감사하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하시면서 모은 돈을 더 어려운 학생에게 나눠주신 덕분에 내가 원하는 수업을 받고, 평범하지 못한 내 생활을 보다 평범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가고 싶다. – 김OO
김군자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런 힘든 일을 겪고도 긍정적으로 사는 할머니를 보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침부터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내가 매우 부끄러워졌다. 또 부모님을 여의신 할머니께서 자신이 겪었던 것을 다시는 겪지 말라며 평생에 걸쳐 모으신 재산을 우리의 장학금으로 보내주셨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감사하면서도 창피했다. 그저 나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던 내가 창피해지는 순간이었다. – 권OO
김군자 할머님께서 계신 곳으로 봉사를 간다고 했을 때 최대한 많은 도움을 드리고 와야지 하는 생각으로 갔는데 생각보다 도움을 드릴 일들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다. 도움을 드리러 갔는데 오히려 가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오셨는지, 그리고 그 힘드신 상황에서도 주변의 다른 이웃을 위해 베푸시는 것들을 보며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워서 도움을 드린 것보다 오히려 배우고 온 것들이 많았다. 내년에 또 기회가 있으면 시간을 내서라도 갈 계획이며 기회가 된다면 개인적으로도 찾아뵙고 싶다. 정말 보람차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하루였다. – 김OO
이정임
숭고한 삶을 살다 가신 할머니를 많은 분들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좋은 곳에서 편안히 지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