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봄, 우토로 주민들을 만나다 |
6천여 평, 70여 세대 재일조선인이 거주해온 조선인 마을 우토로. 우토로가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봄부터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전부터 우토로는 일본에서도 유엔에서도 아는 사람은 아는 문제였습니다. 저와 저의 동료들이 2005년 2월 처음으로 우토로를 찾았을 때 우토로 동포들은 수권의 두툼한 명함책과 그 간의 운동 과정을 담은 빛바랜 사진과 스크랩을 꺼내 보여주었었습니다. 만나는 분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치신 모습이 역력했고, 우토로를 설명하는 말 수도 적었습니다. 체념하는 눈빛이 ‘당신들도 무성한 약속만하고 돌아가면 잊어버리겠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
한(恨)이 서려 있는 땅, 우토로 |
80년대부터 약 20년 동안 우토로 동포들은 스스로 갈고 닦은 땅을 일방적으로 매각해버린 군수기업 닛산 그리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마을 한복판에서, 길거리에서, 법원에서 다양한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우토로 재일조선인이 이 땅에 사는 역사적 이유와 인간의 기본권인 거주권 보장을 외쳤습니다. 닛산과 일본정부에 맞섰고 국제사회에 호소했지만 2000년 일본 대법원은 강제철거를 확정했고, 동포들에게 더 이상의 길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저 그 땅에 철거업자들이 밀려들어오는 순간까지 버티며 살아가는 방법밖에 싸울 수단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우토로 첫 방문에서 우토로 동포 아니 재일조선인 전체의 인간의 존엄과 역사를 존중받기 위한 각 주민 개개인의 신념과 한(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 땅에 살며 일본정부 그리고 대한민국 나아가 한반도를 향해, 조국을 향해 쌓고 쌓아놓은 가슴과 외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가슴에서 시작된 우토로 살리기 운동 |
2005년부터 현재까지 우토로 살리기 운동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우토로 동포들의 그 신념과 간절함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토로 마을을 조망하면서 ‘우리나라 대재벌이 선심 한 번 크게 쓰면 문제 해결되는데…’라고 아쉬워하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저도 강제철거가 임박한 절박한 상황에서는 대기업 회사 정문을 돌파하면서 가위에 눌리는 웃지못할 꿈을 꾸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동포들이 바라는 “우토로의 희망”은 단순히 누군가 돈으로 도와줘서 이 땅에서 계속 살게 해달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이제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기를 |
상하수도도 없고 일본인들은 손가락질 하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그 땅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며 2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우토로의 미래에 대한 어렴풋하지만 꺾을 수 없는 희망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저 땅을 사들여서 내 집만 지키면 된다는 그런 단순한 생각이었다면 벌써 오래전에 우토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한(恨)만큼 깊고 간절한 희망” ― 한국 내에서 차곡차곡 정성들이 모이고 정부가 움직이고 결국 일본정부도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그런 우토로 동포들의 가슴이 우리 사회에 홀씨처럼 퍼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우토로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이어갈 수 있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토로에는 아직도 식민지, 전쟁 그리고 분단의 아픔이 지금도 유령처럼 서성입니다. 이 아픔을 딛고 우리 아이들에게, 일본의 아이들에게 남길 수 있는 우토로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우토로마을 살리기! 마지막 희망모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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