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나선 거리 캠페인
10월 7일 오후 5시, 광화문 지하철 역사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분주하다. 몇몇은 피켓을, 몇몇은 간이 테이블을, 몇몇은 준비해 온 리플릿과 기념품 팔찌를 챙겨들고 자리를 잡느라 고심한다. 금호여중 2학년과 3학년으로 구성된 희망나눔반 ‘본새’ 모둠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과 함께하는 캠페인 현장이다.
계획대로라면 동화면세점 앞에서 진행됐을 거리 캠페인인데 갑작스레 비가 와서 장소가 변경됐다. 난생 처음 해보는 거리 캠페인이라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아이들은 날씨가 따라 주지 않자 슬쩍 위축됐다. 논의 끝에 지하철 역사에서 판을 펼쳤지만 집회신고 장소를 벗어난 상태라 걱정이 인다. 혹여 지하철 공사 관계자가 ‘여기서 이런 거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 어쩌나 불안이 오른다.
그런 아이들을 박수진 반딧불이도 응원한다. 어떤 돌발 상황에도 두려워 말라고 다독인다. 너희가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든든한 뒷심이 되어 줄 거라고 힘을 북돋는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캠페인을 함께 나선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도 지지를 보탠다. 그제야 스스로를 믿게 된 아이들이 캠페인을 시작한다.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모금함과 서명 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마음을 담아 구호를 외친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금호여중 희망나눔반입니다. 청소년들에게 출신학교 차별 없는 세상을 물려주세요! 여러분의 서명이 출신학교 차별과 입시경쟁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굿바이 출신학교 차별!”,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알아서 참 다행이에요!” 등의 문구의 피켓이 눈에 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지하철 역사를 메운다. 처음엔 주저하던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진다.
나를 담아낸 문제, 청소년 성적 비관 자살률 낮추기
금호여자중학교 양지원, 박지은, 이주원, 이명경, 김지혜, 최서연으로 구성된 ‘본새’ 모둠. 뭔가 간지 나는 이름을 짓고 싶어 머리를 맞대고 단어들을 매만지다 ‘간지 나다’의 순우리말인 ‘본새’를 거머쥐었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에겐 ‘멋지고 좋아 보이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나눔도 그렇게 이해했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 뭘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사회를 위한다고 했을 땐 막연했어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하는데 잘 떠오르진 않았죠.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고 마침 미세먼지가 굉장히 심각할 때여서 환경문제를 첫 주제로 뒀어요. 가정폭력, 학교폭력도 논의했지만 별로 진척 없이 지내다 한 달 뒤 시험이 끝난 직후 만나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하다 시험 스트레스를 이야기했죠.” (이주원)
본새 모둠이 ‘청소년 성적 비관 자살률 낮추기’라는 주제를 선택하고선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일상이 스민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듯하고 폼 나는 거대한 주제는 사실 깊이 공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청소년 당사자의 문제는 달랐다. 굳이 이입하려 들지 않아도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다.
“성적 스트레스 얘기하다가 더 좋은 학교를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출신학교’가 왜 중요한지 생각했죠. 그러다 상급학교 진학하고 취업할 때 기준이 되는 게 출신학교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이런 고민을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서 하고 있다는 것도요.” (이명경)
본조 모둠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보다 어린 이들의 미래를 좌우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기관 방문으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찾았을 때 더 깊숙이 와 닿았다. 출신학교차별금지 서명 운동을 벌이는 어른들을 본 지원과 지은은 청소년의 문제를 마치 자신들의 문제인 양 발 벗고 나서서 뛰어다니는 게 많이 고마웠다. 본새 모둠의 캠페인이 어쩌면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을 도와줄 수도 있겠다고 깨달았다. 그것이 동력이 돼서 틈이 날 때마다 만나 캠페인을 준비했다.
“조사하면서 학교 성적으로 고민하고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고 어떻게든 막고 싶어졌어요. 저는 예•체능 분야를 좋아하고 잘해서 그쪽 일을 하고 싶은데 그래선지 예전부터 공부가 전부는 아니고 사람마다 다 다른데 왜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지 답답했거든요. 이 캠페인으로 청소년들이 더 편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자유로이 지냈으면 좋겠어요.” (최서연)
낯선 사람과 행복한 소원을 나누다
본새 모둠이 특히 신경 쓴 부분은 기부와 서명에 참여한 이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내준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뭘 선물할까 생각하다 소원 팔찌를 만들기로 했어요. 출신학교 차별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담아 열심히 만들었죠. 만드는 거 어려웠는데 여러분들이 좋아하니 기쁘네요.”(김지혜)
낯선 사람에게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미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서 이제는 일상이 돼버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십중팔구는 귀찮은 듯 아이들을 스쳤고 그 모습에 상처 받아 어깨가 쳐졌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부러 다가온 누군가가 캠페인에 대해서 묻고 서명을 하고 팔찌를 기쁘게 받아갔다. 그 순간 아이들은 바짝 힘이 났다. 모두 만족시키거나 설득할 수 없어도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캠페인 현장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던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백성주 모금팀장 역시 서로 힘을 모아서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뭔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서로 힘을 주고받는 현장에 감격했다.
“입시 경쟁으로 죽는 아이들이 단 한 명도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여러 정치적 활동이나 캠페인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아이들이 참여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한데 우리 단체에 직접 찾아오고 캠페인을 준비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도 남다른 경험입니다. 오늘 아이들의 목소리로 이 구호를 들으니 굉장히 의미 있네요.”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캠페인으로 6만7천 원의 기부금과 74명의 서명을 받았다. 첫 번째치곤 꽤 괜찮은 결과였다. 비오는 퇴근길의 북적이는 환승 지하철 역사라는 만만치 않은 조건도 잘 넘겼다. 그것은 본새 모둠원 모두에게 묘한 성취감을 가져다주었다.
본새 모둠을 돕고 있는 박수진 반딧불이는 나눔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 시키고 책임감 있게 실천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 기쁘다고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학교 선생님한테도 쭈뼛거리며 서명 받던 아이들이 이렇게 거리에 나와 낯선 이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라고 덧붙인다. 그야말로 몸으로 겪는 변화인 셈. 이런 과정을 통해 거창해서 감히 실천하지 못하는 나눔은 일상으로 안착할 것이다. 이제 본새 모둠에게 나눔은 자신의 주변에서 매순간 일어나는 소소한 일과 중 하나일 뿐이다. 지난봄부터 경험한 나눔교육의 결실이다.
글 우승연 l 사진 조재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