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에는 청소년들이 우선순위 사회이슈를 정하고, 이를 위한 공익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단체를 심사하여 배분,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청소년배분위원회가 있습니다. 청소년배분위원회 2기의 공모주제는 ‘차별’이었으며,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접수받아 심사를 통해 총 5개팀을 선정하였습니다. 청소년배분위원회가 어떤 프로젝트를 지원하였는지, 그리고 어떤 팀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지 하나씩 소개하려고 합니다 . 두번째 이야기로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낭독극 ‘옥상에서’를 제작한 청년창작집단ㅁ과 청소년배분위원 김채림, 김채영, 박재아 위원의 이야기를 소개해드립니다 🙂 |
오전 10시. 일요일 아침 일찍 KTX를 타고 대구로 가는 길,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세 고등학생은 마냥 신이 났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에도 같은 활동을 하면서 친하게 지냈지만, 이렇게 멀리 함께 길을 나선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오늘은 그냥 여행이 아니다. 아름다운재단 청소년 배분위원으로서 사업 현장을 확인하는 ‘출장’이기도 하다.
오후 1시. 대구의 한 소극장 안에서는 마지막 리허설이 한창이다.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니 진짜 마지막 리허설이다. 딱 이틀만 하는 일정이 너무 아쉽다. 그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배우들은 점심을 먹으러 가고, 연출자와 극단 대표는 남았다. 공연을 앞두고는 밥을 먹지 못 한다. 배를 채우는 대신 마음을 채워줄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 연극의 스폰서가 되어준 청소년배분위원들이다. 공연까지 약 1시간 반을 남겨놓은 짧은 시간, 아름다운재단 청소년배분위원과 ‘청년창작집단 ㅁ(미음)’은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지난 8월 면접을 본 뒤로 못 만났는데 벌써 11월의 가을이 되었다. 그 사이에 아름다운재단 청소년배분위원회의 지원을 받은 작품 <옥상에서>가 탄생했다.
세상에는 좋은 어른들도 많이 있구나
청소년배분위원들은 이미 중학생 시절 아름다운재단 나눔교육 ‘반디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 사회참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청소년배분위원회는 또 다른 세계였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훨씬 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달랐다. 어른들의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의 사업을 심사하고 평가하는 위치였다. 그 과정은 모두 청소년들이 만들어 갔다. 주제를 정하고 기준을 정하는 것도 면접 질문을 만들고 심사를 하고 사업을 관리하는 것도 모두 청소년들의 몫이었다. 청소년들끼리 함께 토론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운영해야 했다.
김채림 위원은 “되도록 모든 의견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소수 의견을 가진 분들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서로를 설득하는 방식으로 토론했다”고 전했다. 박재아 위원은 “이렇게 우리가 다 할 줄은 몰랐다”면서 “힘들긴 하지만 정말 재미있다. 청소년도 같은 ‘동급’으로 취급 받고 어른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배분의 과정은 성장의 과정이기도 했다. 특히 김채림 위원과 김채영 위원은 이번이 두번째 배분위원회 활동인데, 지난 번에 비해 활동이 쉽고 빨라졌다고 한다. 모여도 뭘 해야 할지 막막했던 1기 때와는 달라진 것이다. 이들은 “작년에 언니들이 많아서 저희가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올해는 이들이 언니가 되어 배분위원회 경험을 들려주고 해결방안도 찾는다. 사회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박재아 위원은 “생각이 깨어진 게 정말 많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른 조금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제가 사실 호모포비아였거든요”라면서 “여기에서 성소수자 문제도 함께 다루다 보니 정말 많이 생각이 달라졌어요”라고 전했다.
어른들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김채영 위원은 “다른 곳에서 만난 어른들과는 딱딱하고 수직적인 관계가 많은데 여기는 반대다”라고 말했다. ‘천만원이나 되는 돈을 잘못 배분하면 어쩌나’ 걱정도 많았는데 그 부담을 덜어준 것도 이런 좋은 어른들이었다. 그는 “나도 어른이 되면 자신의 이야기를 잘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많이 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명만이라도 움직이고 싶은 마음으로 올린 연극
이날 만난 청년창작집단 ‘ㅁ(미음)’의 정재학 씨와 조대흠 씨도 그렇게 좋은 어른 중의 하나이다. ㅁ은 연극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만든 집단이다. 대구에서 활동하면서 꾸준히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고 있다. 예술로 밥 먹고 산다는 것, 심지어 수도권 외 지역에서 그렇게 살아남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연극이 너무 좋아서 창작활동을 이어간다.
어느 곳에서 받든지 지원 자체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재단 청소년배분위원회의 지원사업은 여러 모로 이들의 작품과 이어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들이 준비한 연극 <옥상에서>는 배분위원회의 방향과 딱 맞아 떨어졌다. 사업 공지 글에는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라는 문장이 있었다. 연극을 통해 만들고 싶은 사회도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옥상에서>에는 4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기를 임신한 여성 청소년, 면접에 번번히 낙방한 청년 백수, 연인과 사별한 성소수자,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노인. 이들이 옥상에 올라간 이유는 모두 같다. 이제 그만 세상을 떠나고 싶어서다. 누군가의 방해 없이 무사히(?) 죽고 싶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내려 보내기 위해서 서로 다투다가 결국은 서로를 토닥인다.
연출가 조대흠 씨는 소수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한다. 사람들도 좀더 열심히 들을 것 같았다. 이들이 절벽까지 몰렸을 때 가는 그 곳, ‘옥상에서’라면 말이다. 극단 대표이자 무대감독인 정재학 씨가 멋진 해석을 덧붙였다. 이렇게 올라간 옥상이 어찌 보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더 자유로운 곳이라고 말이다.
면접하던 날 이들은 청소년 배분위원들에게 열심히 이 같은 취지를 설명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은 “이 연극으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작품을 만들면서도 고민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이들은 “한 명에게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이 변화”라고 답했다. 거창하지 않지만 진정성 있는 이 답변이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위원들에게도 이 질문과 답변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연극에 다양한 소수자가 등장한다는 점도 좋은 점수를 얻었다. ‘차별 해소’라는 사업의 방향을 종합적으로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 특별한 ‘관객과의 대화’
그렇게 청년창작집단 ㅁ은 지원사업에 선정이 됐고 무사히 연극을 올렸다. 반응도 참 좋았다. 관객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공연하면 좋겠다”고 소감을 남겼고, 배우들은 “아쉽다. 재공(재공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 명에게라도’ 닿길 바라는 간절함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린 것이다. 막공에는 참으로 고마운 청소년 배분위원도 ‘모셨다’. 위원들을 초청한 것만으로는 마음이 차지 않아서 이들은 참 아쉬워 했다. 극본도 미리 보여주고 함께 의논도 하고 싶었는데, 워낙 거리도 멀고 준비 기간도 빠듯해서 원하는 만큼 충분히 소통하지는 못한 것이다. 애초에는 브로셔에 배분위원들의 이름을 다 넣으려고 했다가 인원이 너무 많아서 위원회 이름만 넣었다고 한다.
그래도 배분위원들에게 이번 공연은 남이 만든 공연이 아니라 ‘우리의 작품’이다. 이들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포스터 앞에서 개인 사진도 찍고 단체 사진도 찍었다. 연극을 보고 나서 후기 카드에 빼곡하게 소감을 적었다. 얼마나 신중하고 길게 적든지 꼴찌로 카드를 냈다. 카드에는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를 위해’라는 바로 그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렇게 함께 만든 연극이 끝나고 배분위원들과 청년창작집단 ㅁ은 텅 빈 관객석에 다시 옹기종기 모여 앉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배분위원들은 캐릭터 구성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청소년 미혼모에 대해 많은 공감을 나타냈다. 이런 평가 하나하나가 연출가에겐 매우 소중하다. 정재학 씨는 “위원들의 심사가 틀리지 않았다고 작품으로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심사는 틀리지 않았다. 배분위원들은 이번 작품을 통해 연극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듯했다. 김채영 위원은 “청소년 문제 위주로 이런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영감을 얻었고 “다음 연극에도 불러달라”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조대흠 씨는 “직접 쓰시면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은근히 작품 활동을 부추겼다.
이들은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아쉽게 헤어졌다. 사회를 바꾸고 싶은 청소년들과 어른들은 이렇게 동등하게 만나 서로를 응원하면서 손을 잡았다. 옥상에서 만난 사람들이 결국 서로를 보듬는 것처럼 말이다. 연극은 끝났지만 파트너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 ㅣ박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