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분’. 활동가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시민들에게 좀 낯선 표현이다. 보통 재단이나 기관에서 ‘배분’이라는 용어는 공익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자원을 나누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돈만 나눠주는 일은 아니다. 정말 배분이 필요한 사회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해서 주제를 선정하고, 기준을 만들고 심사를 해서 지원팀을 선정하고, 실제로 활동이 잘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평가도 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 배분위원회는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다.
그래서일 것이다. 청소년들은 배분위원회 활동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때 막연히 “돈을 입금해주는 일”, “돈봉투를 나눠주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청소년에게 맡길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려운 고민과 결정은 어른들이 하는 것이니까. 심지어 청소년의 사회참여 활동에서도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정한 대로 주어진 일만 하니까.
그러나 아름다운재단 청소년배분위원회의 활동은 전혀 다르다. A부터 Z까지 모든 일을 청소년들이 직접 맡는다. 9명의 배분위원들이 열심히 토론을 통해서 ‘차별 해소’라는 주제를 정하고, 선정 절차와 심사기준도 결정한다. 심사와 선정은 물론 각 프로젝트 팀과 소통하는 것도 모두 청소년 배분위원들의 몫이다. 성인 활동가들은 거들 뿐이다. 그렇게 청소년들은 1천만원을 배분했다.
시작도 그러했으니 마지막도 온전히 청소년들의 몫이다. 1년 동안 활동한 결과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보고회 자리도 청소년들이 마련했다. 배분위원들은 역할을 나눠서 행사장을 세팅하고 손님을 맞고 사회도 보고 발표도 했다. 결과보고회 현장에 내걸린 현수막에는 ‘틀림이 다름이 될 때까지’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 또한 배분위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한 문구이다.
주제 선정도 심사도 결과보고회 개최도… 모두다 청소년 배분위원의 몫
청소년들이 만든 배분의 결과는 결코 작지 않다. 이날 공유된 내용을 함께 들여다보자.
마포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무지개의원’은 인권과 다양성을 주제로 ‘무지개학교’를 열었다. 노동과 건강, 노인, 장애 등의 다양한 이슈를 다룬 4회차의 수업에는 매번 20여명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건강은 정신과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는 후기를 남겼다. “사회에 차별과 혐오가 없어야 구성원들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무지개의원의 정신에 공감한 것이다.
매드프라이드미디어기록단은 정신장애인의 자긍심 축제인 ‘매드프라이드’의 전 과정을 준비부터 행사 개최까지 꼼꼼히 카메라에 담았다. 축제에는 2,000여명의 참가자가 함께 했고, 기록단은 3TB테라바이트 분량의 데이터를 쌓았다. 뉴미디어 매체에서 관련 콘텐츠들이 총 9만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주요 언론사들의 취재가 이어졌다. 기록단이 만든 영상을 요청하는 언론사도 많았다.
수퍼아이(위민에서 팀명 변경)는 영유아를 위해 평등한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기돼지 3형제’를 바꾼 ‘아기돼지 3남매’는 셋째 돼지가 다른 돼지들을 포용하는 내용이고, ‘해와 바람’은 연기 때문에 고통받는 해와 바람을 위해 소녀가 환경 문제를 알려나가는 내용이다. 이러한 콘텐츠가 5편 만들어졌고 총 4,151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수퍼아이는 유아 미디어 리터러시 교구 개발에도 나섰다.
청년창작집단 ㅁ은 연극 <옥상에서>을 만들었다. 청소년 미혼모, 노인, 청년 취업준비생,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생을 끝내려 올라간 옥상에서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단 이틀 간의 공연이지만 103명의 관객들이 연극을 봤다. 한 관객은 “차이 때문에 아파하지 않기를,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관람평을 남겼다.
청소년이 하면 배분도 이렇게 다르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청소년배분위원들은 성인으로 구성된 아름다운재단 배분위원회를 만나 배분활동에 대해 배웠고, 차별금지법제정연대를 만나 차별 문제도 공부했다. 매달 2차례 회의를 하면서 공모와 심사를 준비하고 상황을 점검했다.
청소년배분위원들은 특히 심사가 힘들었다고 했다. 모든 단체에 자원을 나눌 수 없는데, 배분을 신청한 사업들은 모두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막상 나눠 보니 1천만원은 충분히 큰 돈이 아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학업과 배분위원회 일을 병행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기 중에는 시험 일정이 있었고 방학에는 가족 여행 등의 다른 일정이 자꾸 겹쳤다. 위원들마다 일정이 달라 더 어려웠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성실하게 거치면서 청소년배분위원들은 한 뼘 더 성장한 듯했다. 서로 생각이 다른 위원들끼리 토론을 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차별 이슈를 새로 접하고,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지식도 문제의식도 깊어졌다. 이후에 직접 공익활동을 해보겠다고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배분위원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청소년배분위원회가 청소년들의 성장만을 위한 활동은 아니다. 그보다는 청소년들의 강점을 잘 살린 배분활동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기존의 관점이나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청소년들의 새로운 시선으로 만드는 배분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배분은 다른 배분과는 많이 달랐다. 보고회에 참석한 프로젝트팀들은 “면접 과정이 너무 따뜻했다”고 입을 모았다. 다소 고압적으로 느껴지던 기성세대 배분위원과 달리 청소년 배분위원들에게서는 어떻게든 활동을 지원하고 싶은 응원의 마음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복잡한 영수증 증빙을 요구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우리가 뽑은 팀인데 믿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배분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고민해야 한다. ‘틀림이 다름이 될 때까지’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지난해 내내 아름다운재단 청소년배분위원회와 프로젝트 팀이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원이 공익활동에 전달되면서 변화는 시작된다. “부끄러운 것은 차별 받는 우리가 아니라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이라고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 사회를 함께 사는 우리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며 사람들이 서로 손잡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거대한 차별의 벽을 허무는 작은 변화의 시작일 것이다.
청소년배분위원들과 프로젝트 팀의 활동 말말말 “배분이 뭔지도 모르고 들어왔는데, 전에 했던 활동과 너무 다르게 우리가 주제도 정하고 면접도 했다. 무지개학교 강연을 들으면서 작은 변화로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알았다.” (청소년배분위원 김현태) “문제는 아닌데 문제시된다는 말이 있다. 앞으로는 이 사회가 문제가 아닌 일들이 문제시 되지 않도록 차별이 없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고, 저희가 꾸준히 노력해갔으면 좋겠다.” (청소년배분위원 박재아) “대구에 있어서 많이 소통도 못했는데, 위원들이 멀리까지 와서 공연에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저희 활동에 아름다운재단 청소년배분위원회가 정말 좋은 기회였다.” (청년창작집단ㅁ 정재학) “매드프라이드에 갔을 때, 어떤 분이 ‘집에서 나와서 광장에 가는 게 제일 힘들었다’고 말씀을 하셨다. 고통받는 게 병 자체가 아니라 사회의 시선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청소년배분위원 변서윤) “중년의 남자 위원들이 저희를 떨어뜨리려 애쓰는 것 같은 분위기에 굉장히 익숙한데, 이번 면접에서는 따뜻한 이야기에 울고 나왔다. 일방적으로 지원해주고 행정적으로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하고 교류하는 시간이 된 것 같아서 감사하다.” (매드프라이드미디어기록단 마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