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에서 두 번째 불러보는 ‘할머니’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한 지 만 6년. 그동안 다양한 기부자님을 만나왔지만 간사와 기부자가 서로를 꼬-옥 껴안고 서로의 등을 쓰다듬어주는 일이 이전에도 앞으로도 과연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서로의 온기를 전했던 따스한 그 품은 시간이 지나도 촉감으로 온전히 기억합니다.
‘OOO 기부자님’이라 부르는 게 당연함에도 기부자라는 호칭 대신 그저 ‘할머니’라고 부르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고 익숙한 사람. 아름다운재단에서 두 번째로 불러보는 그 ‘할머니’란 이름. 바로 ‘이순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첫 번째 할머니는, 아름다운재단하면 빼 놓을 수 없는 1호 기금출연자, 김군자 할머니입니다.)
할머니가 남기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약속
이순희 할머니는 과거 2007년, 유산 기부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더 부족하던 시절에 유언공증을 통해 유가족에게 남기는 일부를 제외하고, 아름다운재단을 포함한 5개 기관에 당신이 평생 일구신 재산의 대부분을 사후에 유산으로 남기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고는 2020년 3월,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며 아름다운재단에 남기신 유산 기부금은 할머니가 사랑하는 또 다른 이름을 딴 ‘베로니카불꽃기금’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새해나 명절이면 서로 안부를 묻고, 만나서 식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기부자와 간사를 넘어 또 하나의 끈끈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새로운 유산 기부 담당자로 제가 할머니를 뵌 건 2019년 추석이 처음이었지만, 그전부터 할머니께서 유산 기부를 약속하시며 남기신 손 편지, 과거 재단에 방문하셨을 때의 모습이 담긴 10여 년 전의 사진들, 선배 간사로부터 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들이 익숙했기에 첫 만남이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온 듯 낯설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치아가 불편하여 식사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한 탓에 사진보다는 많이 여위어 계셨지만, 89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총명하고 정정하신 이순희 할머니는 생각과 마인드가 참 멋진 어른이셨습니다.
“젊은 게 아름다운 거야. 그러니 젊을 때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배워야 해. 그게 큰 자산이지.”
그날 해 주신 여러 이야기 중, 이 말씀은 마음속에 깊게 남아있습니다.
젊은 시절, 통역사로 활동하시며 가진 역량을 마음껏 펼치셨던 멋진 할머니, 나중에는 송현 수필문학회 회원으로 글도 쓰시고 그 글이 담긴 수필집도 선물해 주셨던 문인이었던 할머니, 집을 찾아온 강아지, 고양이, 비둘기까지 댁에서 거두신 정이 많은 할머니, 자신에게는 알뜰하시지만 남을 돕는 일과 미래세대를 위해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는 무척이나 통이 크신 할머니, 평생 당신의 삶을 통해 직접 경험하고 느끼신 소중한 깨달음을 따스한 눈길과 함께 쿨하게 나누어주신 할머니…. ‘이렇게 나이 든다면 참 멋지겠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분이셨습니다.
“나의 조그만 재산이나마 의미 있게 쓰고자 하는 것이 나의 원이기도 했다…(중략)
많이 갖고 많이 아는 사람들이 사회에 환원하고, 나눔의 습관이 쉽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내 나이 늙어가나 나눔의 삶에서 마음이 부유하고, 허전한 마음 밭에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싶다.”_ 故 이순희 님의 유산 기부 칼럼 중
‘언젠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을 한 것이 제일 잘한 일’이라고 하신 이순희 할머니. 할머니의 유산 기부는 물질적 유산을 넘어 평생 품은 삶의 신념과 가치를 후대와 사회에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정신적 유산이기도 합니다.
‘베로니카불꽃기금’, 할머니의 전 생애와 신념이 담긴 유산기금이 이름처럼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는 ‘나눔의 불꽃’이 되어 앞으로 더 많은 이들에게 그 가치가 오래도록 번져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은 고인이 남기신 가치를 기억하며 그 뜻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유산기부는 한 사람의 인생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숫자로 매겨지는 돈이 아니라 소중하게 품어 온 삶의 가치와 신념, 그리고 그 너머, 타인과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나누는 용기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약속, 유산기부. 다가오지 않은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을 더 멋지게 살아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걸 몸소 알려주신 故 이순희 할머니,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