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은 공익활동을 하고자 하는 시민모임, 풀뿌리단체, 시민사회단체를 지원합니다. 특히 성패를 넘어 시범적이고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함으로써 공익활동의 다양성 확대를 꾀합니다. ‘2020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에서 어떤 활동들이 진행되는지 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허락되지 않은 기억’이란 무엇일까?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용산 전쟁기념관의 한국전쟁 전시 내용을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용산 전쟁기념관은 한국에서 가장 큰 한국전쟁 기억공간이다. 물론 국가가 운영한다. 전쟁기념관 건물로 들어가기 전 지나는 회랑에는 한국전쟁 전사자의 이름으로 가득한 비석들이 늘어서 있다. 이 길을 통과해 전쟁기념관 한국전쟁 전시실로 가면 매우 호전적이고 애국주의적인 전시 내용들이 펼쳐진다.
전장에서의 수많은 죽음은 물론 그들을 죽인 적군의 책임이겠지만, 그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지키지 못한 국가의 책임도 있다. 전쟁기념관은 수많은 전사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전혀 말하지 않은 채, 전사자를 오직 적군에 의해 장렬히 전사한 영웅으로만 추앙한다. 이러한 기억 방식이 바로 국가에 의해 ‘허락된 기억’ 방식이다. 그렇게 전쟁기념관은 ‘허락된 기억’의 전형이 된다. ‘허락되지 않은 기억’은 기억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국가의 책임을 들춰내는, 국가를 곤란하게 만드는, 국가가 마주하려 하지 않는 기억이다. 그리고 ‘허락되지 않은 기억’은 2020년 10월 29일부터 11월 22일까지 열린 ‘한국전쟁 70년 기억 사진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허락되지 않은 기억’ 전시의 영문명은 RESTRICTED다. 전시에 사용된 사진은 대부분 미군 사진병이 찍은 사진들인데, 그 사진 중 몇몇 사진에 RESTRICTED란 도장이 찍혀 있고, 그 위에 취소선이 그어져 있다. 미군 찍은 사진을 상부가 검열하는 과정에서, 사진이 공개되어선 안 된다고 판단하면 RESTRICTED라는 도장을 찍는다. 50년이 지나 금지가 풀리면서 다시 그 위에 취소선이 그어진다. ‘허락되지 않은 기억’이 다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아직 ‘허락되지 않은 기억’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흔히 용산 전쟁기념관의 한국전쟁 기억을 ‘한국전쟁의 공식기억’이라고 부른다. 전쟁기념관을 위시한 전국의 수많은 전쟁기념시설이 ‘공식기억’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 기억은 바로 전쟁 지도부의 기억이다. 전쟁 지도부는 ‘객관적’인 위치에서 전쟁을 관찰한다고 간주되지만, 거기에는 민간이 겪었던 전쟁의 모습, 가령 피란과 폭격, 학살과 같은 피해 사실은 포함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쟁에 동원된 노무자들이나 ‘위안부’가 겪었던 일, 심지어 참전군인의 트라우마나 상이군인의 이야기도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다시 드러내고 그것을 마주해야 할까? 앞에서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국가가 마주하려 하지 않는 기억이라고 썼다. 기실 국가만 그러할까. 많은 사람은, 또 우리는 ‘공식기억’이 훨씬 익숙하다. 매년 6월에 치러지는 6.25전쟁 기념행사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호국보훈(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몰랐겠지만)의 정서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우리의 신체에는 적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이 새겨진다. 동시에 그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국가 안보가 제일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한 안보제일주의야말로 한국전쟁과 그 이후 길게 이어진 군사독재 기간 동안 수많은 학살과 ‘빨갱이 사냥’을 정당화하는 주요 기제로 작동했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위와 같은 안보관에서 자라난 평화란 어떤 평화일까. 적어도 그 평화는 전쟁피해자의 인권을,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자의 반성을, 그리고 국가에 의해 침묵당해왔던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평화는 결코 깊은 전쟁의 상흔을 배제함으로서만 성립하게 되는 그 ‘허락된 기억’ 위에서는 자라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전시의 자세한 내용을 다 소개하지는 못하겠지만, 꼭 소개하고픈 전시의 한 꼭지가 있다. ‘불러보는 이름’이라는 제목의 방인데, 이곳에서는 관람객들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 피해자의 이름을 직접 부르고, 그 부르는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게끔 했다. 전시가 설치된 방은 지난 군사정권 시기 실제 민주화인사들에 대한 고문이 자행되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의 명단이 대공분실 벽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다.
노태우 군사정권에서 기획되었던 전쟁기념관의 전사자 명비와, 군사독재 폭력의 상징과도 같은 대공분실 안 국가폭력 피해자의 명단은 관람객들에게 사뭇 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많은 이름들 옆에는 사망 당시의 나이와 성별, 어느 지역에서 어떤 경과로 일어난 사건에서 학살당했는지를 적어놓았다. 이런 정보만으로 피해자의 실제 삶을 떠올릴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죽음을 맞게 되었을지 조금이나마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것부터 어떤 종류의 평화적 상상력이 시작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전시 기간 동안 많은 분들이 전시를 보러 와주셨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잘 보거나 듣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고 말해주셨다. 그것만으로도 전시의 역할을 다 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공식기억’의 공고한 지위가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공식기억’의 단단한 표면에는 점점 더 많은 균열이 생겨날 것이다.
실제 공간에서 하는 전시는 끝났지만, 전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온라인 전시관을 만들었다.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전시를 보고 더 많은 분들에게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전시 프롤로그의 마지막 대목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부디 본 전시가 그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던 목소리에 조금의 숨통이라도 터주기를 바란다. 그 목소리를 듣게 될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온라인 전시관 주소
restricted.or.kr
글 : 열린군대를 위한 시민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