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는 지속가능한 사회발전을 위한 주요한 동력으로, 사회의 다양한 문제해결, 정부의 공공재 공급의 보충적 역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권리의 옹호, 공론장과 사회적 자본 창출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나 대부분 비영리기반의 시민사회단체 공익활동가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어 지속가능한 공익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이들의 소진을 예방하는 지원이 필요합니다. 공익활동가 쉼 지원사업은 활동과 삶의 조화를 위한 쉼 활동 지원을 통해 지속가능한 공익활동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지원사업입니다. 이 글은 2020 공익활동가쉼지원사업에 선정되어 활동한 여성환경연대 이안소영님의 후기입니다. |
몸과 마음 모두 온전히 쉬기
아름다운재단의 공익활동가 쉼 지원사업을 신청할 당시의 목표는 무언가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시달리지 않고 몸과 마음 모두 온전히 쉬기였다. 온전히 쉬고 나면 하고 싶은 일이 생기고, 그렇게 생기는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하리라 생각했다. 제주 혼자 살기에서 제대로 쉬기 위해서는 제주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편하고 아름다운 공간에 머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숙소를 고르고 정하는 데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첫 번째 숙소는 저지리 근처의 자연친화적인 민박으로 ‘숲속 작은 집’ 느낌으로 평화롭게 머물 수 있는 곳이었고, 세 번째 숙소는 평대리 부씨 집성촌 안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제주 집이었다.
두 번째 숙소는 주변이 귤밭으로 둘러싸여 8월 여름부터 12월 겨울까지 귤밭의 계절 변화와 다채로움을 볼 수 있었다. 도시에서 귤을 사 먹는 소비자로서 귤나무의 변화를 시간을 따라가며 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숙소가 위치한 장소성이 극대화되어 장점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한라산으로 올라가는 중산간 지역이라서 마을 산책길에 소규모 말목장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풍경도 매일매일 함께 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삼양 해수욕장까지는 왕복 2시간 반 정도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생각하기에 따라 걷기엔 먼 거리일 수 있지만, 매일 달라지는 바다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춰 날마다 걸어가는 길이 쉼 기간 동안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만큼 충만했다. 숙소 인근의 간드락 소극장은 코로나로 전시를 하기 어려워진 제주도 내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한라산과 제주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단색 물감으로 소박한 종이에 그려낸 작품들이 일상예술의 품위와 재미를 느끼게 해 주어 예술의 역할과 기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젊은 예술가들이 제주도의 삶과 바다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재현해 내고자 하는지 엿볼 수 있어 짧은 시간의 관람이었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창작의 욕구가 생겨나는 기회가 되었다.
쉼지원사업을 통해 이타미 준의 건축물 둘러보기, 서핑, 도자기 굽기, 드로잉 등의 활동을 체험했다.
그 중 이타미 준의 건축물은 열림과 닫힘, 자연과 함께 숨 쉬는 건축, 공간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은 건축을 꿈꾼 이타미 준을 그린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가 매우 인상 깊어서 몇 년간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포도호텔에 숙박하진 못 해서 건축 전체를 오롯이 느끼기는 어려웠으나 제주도의 돌담집을 모티브로 인근 지형과 이물감 없이 나지막하게 지어졌으며, 복도 중간 정원에도 제주도의 햇볕과 돌을 건축물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 점이 인상 깊었다.
방주교회는 보는 방향에 따라 반사되는 해의 빛의 색감과 양이 다양하고,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한 건축물답게 교회를 둘러 싼 수로에 비친 하늘과 건물 또한 매우 아름다워 이타미 준의 건축이 추구하는 건축 철학과 세계관의 일부를 느낀 만족감이 있었다. 삶과 일의 철학이 이론이나 언어가 아니라 공간 디자인으로 구현되면서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이 별도의 매개 장치 없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것에 대해 사유하며, 사회변화와 임팩트가 이런 방식의 공간 재구성을 통해 가능한지 모색해보고 싶었고, 짧게 방문했으나 많은 영감을 얻었다.
서핑은 별도의 에너지원이나 도구 없이 오로지 파도와 보드만 갖추면 가능한 스포츠일 뿐 아니라, 바다와 햇빛과 바람을 즐기며 그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해양 스포츠라서 생태친화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랜 동안 배우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마침 이번 쉼 여행 동안 배울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코로나로 인해 서핑 강습을 연기하다가 결국 12월까지 가게 되었다. 12월이 되어 이 추위에 과연 서핑이 가능할까 반신반의 고민 끝에 강습을 받았다. 의외로 춥지 않았고, 오히려 여름에 비해 강습인원이나 해수욕장 방문객이 거의 없어 한적하게 즐길 수 있었다. 보드 위에 일어서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몇 차례의 연습을 통해 혼자 설 수 있게 되었으며 짧은 시간이나마 보드를 타고 해안까지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주의 여름이 아닌 겨울 바다를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비록 겨울 날씨의 한계도 있고 파도도 높지 않아서 최고의 재미를 즐기지는 못 했으나, 몇 년간 버킷리스트 상위에 올라 있던 서핑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행복했다. 보드 하나만 들면 맘껏 즐길 수 있는 단순 소박한, 어딘지 환경운동을 닮은 해양스포츠 혹은 삶의 기술을 익히게 되어 꿈꾸었던 쉼과 재충전의 의미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