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이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만 알았어요.”
강희영 씨는 최근 점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 읽지 못하고 쌓아뒀던 공문들을 다 읽었다. ‘2020 여성장애인 맞춤형 보조기기 지원사업‘을 통해 지원받은 광학문자판독기 덕분이다. 이전에는 식당인지, 카페인지, 미용실인지 추측해서 들어가야 했는데 이제 간판도 직접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편해진 건 누군가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식당에 가면 직원들이 보통 메뉴만 이야기해줘요. 그런데 가격도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잖아요. 광학문자판독기를 지원받은 후로는 제 주머니 사정에 맞게 메뉴를 고를 수 있어요. 안경에 부착된 광학문자판독기가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읽어주니까요. 스마트폰 앱은 매번 사진을 찍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이 기기는 손가락 움직임 하나로 순식간에 인식을 해줘서 훨씬 편해요.”
제품의 이름은 “MY EYE”. 말 그대로 새로운 눈이 된 이 보조기기에 강희영 씨는 기대가 크다. 지금은 간혹 판독에 오류가 있기도 하지만, 자동 업그레이드 기능이 있어 갈수록 판독률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장애인 날개달기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광학문자판독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원을 통해 새로운 정보까지 얻은 사례다. 이런 정보가 널리 퍼지는 일이 중요하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자존감을 세워주고, 삶을 새로 살게 해준 보조기기
“저도 예전에는 시각장애인이 스마트폰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아니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스마트폰을 써? 어떻게 컴퓨터를 해? 시각장애인이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만 알았어요. 재활훈련을 받고 보조기기를 써보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은 다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런 경험들이 저에게 용기를 줬고 사회로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어요.”
강희영(서울시각장애인복지관 강사) 씨는 서른다섯 살에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다. 망막색소변성증은 시각 세포가 손상되면서 점차 시야가 좁아지는 질환이다. 당시 그는 준비하던 결혼과 출산을 모두 포기했다. ‘눈이 안 보이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이 강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바꿔준 계기 중 하나는 보조기기다.
“망막색소변성증은 갈수록 눈이 안 좋아지는 질환이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없어질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재활을 받고, 보조기기를 쓰다 보니까 오히려 하루하루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어요. 그때 마음은 뭐라 표현할 수 없어요. 보조기기는 제 자존감을 세워주고, 삶을 새로 살게 해줬어요. 제가 눈이 안 보이는데도 이렇게 열심히 살 줄 몰랐어요. (웃음)”
“휠체어에 몸을 맞추며 살아왔던 나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하석미 씨(한국장애인힐링여행센터 대표)는 오랫동안 바라던 수전동 휠체어를 지원받았다. 이전에 사용하던 전동 휠체어는 자신의 몸에 비해 폭이 좁아 종일 앉아 있으면 몸살이 난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또 바퀴에 팔이 닿지 않아 항상 누군가 밀어줘야 했다. 휠체어 소음이 너무 커서 이동할 때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다른 지원은 훨체어나 욕창 방석같이 물건 하나를 지정해서 지원하는데, <여성장애인 날개달기 프로젝트>는 개인에게 필요한 걸 맞춤으로 지원해줘서 좋았어요. 수전동 휠체어는 제가 오랜 시간 매일 써야 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저에게 딱 맞는 기기를 찾는 게 중요했거든요.”
그는 이번 지원을 통해 다양한 수전동 휠체어를 직접 타보았다. 성능과 무게, 승차감을 비교하며 자신에게 꼭 맞는 제품을 고르기 위해서다. 자신의 신체적 특징에 맞게 바퀴나 몸체의 폭도 바꾸었다. 덕분에 수전동 휠체어 ‘박사’가 다 됐다. 이제 종일 휠체어를 타도 몸이 아프지 않다. 그는 이런 노하우를 다른 여성 장애인들과 더 나누고 싶다.
새로운 변화의 문을 두드린 <여성장애인 날개달기 프로젝트>
하석미 씨는 이번 보조기기 지원이 “기성 제품에 몸을 맞추며 살아왔던 나에게 ‘날개’를 달아줬다”며, 지난주 소래포구를 다녀온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평소에도 여행을 즐기던 그에게 휠체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동반자이다.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이전처럼 해외여행도 떠날 생각이다.
강희영 씨 역시 “직접 기기를 가져와 시연해주어 원하는 제품을 선택할 수 있었다”며 덕분에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블루투스 키보드를 보통 얼마에 사냐?”고 묻기도 했다. 5만 원 정도면 산다고 답하니, 시각장애인용 블루투스 키보드는 100만 원가량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보조기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고가의 비용 때문에 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이런 지원이 정책적으로 확대되는 것이 중요하다.
“재활훈련을 가보면 열 명 중 한두 명만 여성장애인이에요. 일단 신체적으로 약하다는 생각에 더 위협을 느끼는 거 같아요. 낯선 곳에 가는 것도 두렵고, 뭔가를 시작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길고, 정보가 없는 상태로 지내게 되는 거죠. 재활훈련이나 보조기기에 대한 정보 전달과 지원이 절실한 이유에요.”
그런 의미에서 <여성장애인 날개달기 프로젝트>는 새로운 변화를 위한 두드림이었다. 하석미 씨는 처음 휠체어를 맞출 때만 해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달하지 못해 오랜 시간 불편을 감수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용기 내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고, 그를 통해 변화를 끌어냈다. 이들이 이 두드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보조기기는 새로운 문을 열 수 있는 두드림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계속 이 문을 두드릴 생각이에요. 같이 문을 두드려요. 그럼 그 문이 열릴 거예요.”
글/우민정, 사진/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