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이랬다.
따르르르르릉.
“아름다운재단입니다.”
“여,보,세,요? 아,름,다,운,재,단 킴지나 칸사입니까?”
“네, 맞습니다. 말씀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캄보디아 NGO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어이쿠야.’
“죄송하지만, 제가 영어가 짧아서…”
외국 NGO활동가의 전화였다. 몇차례의 외국 여행 경험과 사람 별로 안 가리는 성격 덕분에 ‘외국인기피증’ 따위는 없지만, 회화 레벨 2단계(민oo전화영어 테스트 기준) 약점’을 가지고 있는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다행히 그녀는 한국어를 잘 구사하는 편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제,가, 영,어,로 말해도 될,까,요?”
뒤를 돌아보니 늘 든든하게 영어브리핑을 맡아주는 연구교육팀장도 자리에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아, 죄송한데 제가 영어가 짧아서 한국어 가능하시면 한국어로 말씀해주셔도 될까요?”(이 당당함은 뭐지;;;ㅠ)
스스로의 뻔뻔함을 자책하는 사이, 다행스럽게도 한국어 구사가 능숙한(?) 캄보디아 활동가는 웃음 띈 목소리로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요지는 캄보디아에서 도서관 사업을 담당해온 그녀(몰리나 Molyna) 가 한국 방문할 계획이 생겼는데, 아름다운재단도 방문하고 싶다는 거였다. 재단에 대해서는 이미 몇가지 정보를 알고 있었다. 나는 한국어로 말하는 게 힘들 그녀를 위해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보내달라는 말을 전하고 전화를 마쳤다.
곧바로 메일이 도착했다.
일하고 있는 단체를 <SIPAR>라고 소개하며, 모금을 이끌어내기 위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재단의 경험과 방법을 듣고 싶다고 했다. 아름다운재단 전반에 대한 이해를 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말하기 수준에 비해 읽고 쓰는 수준이 조금 나은 덕분에, 메일을 통해 방문 취지를 확인한 후 답장도 보냈다. 날짜와 시간도 정했다.
그리고 나는 영어브리핑이 가능한 연구교육팀장에게 협업을 요청했다. 본의아니게 전화통화로 ‘한국어를 강요’했던 터라, 방문했을 때는 편하게 영어브리핑으로 안내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답장이 없었다.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났다. 메일 수신확인도 되지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싶어 캄보디아 현지로 전화문의도 했지만, 통화도 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영어브리핑 협업을 요청했던 팀장이 개인사정으로 ‘브리핑 날짜로 약속한’ 날에 휴가를 내도 되겠냐며 문의를 했다. ‘설마, 약속 회신도 없었는데 갑자기 방문하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쏘쿨’하게 휴가내시라고 답을 한 다음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약속한 날짜, 바로 그 시간. 야속하게도 내 전화벨이 울렸다.
“킴,진,아 칸사님. 1층인데, 문이 잠겨있어요.”
‘오, 마,이, 갓.’
삶에는 언제나 반전이 있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라는 이승환의 노래를 떠올리며 1층으로 뛰어내려갔다. 환한 얼굴의 남녀 두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약속날짜를 잡았으나 답장을 받지 못했고 일정이 바뀌어 오지 못하는 줄 알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용 -오늘 브리핑은 영어로 진행이 불가능하다는-을 전달했다. 함께 온 몰리나의 ‘미쿡 친구’에게는 직접 영어로 통역해줘야 할 것이라며 거듭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생에는 언제나 반전이 있는게 아닌가. 노란머리에 갈색 눈을 한 미쿡인 친구 마이클스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쿡말 초큼 해요. 알아 들어요. 걱정마세요”라고 말하며 환하게 말했다.
음, 이건 반전이라기보다 행운이라고 밖에. ^______^ ;
나는 한국어에 능숙한 두 외국인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영어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열고 아름다운재단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재단의 비전과 미션, 조직구조, 주요 모금사업과 배분, 첫 기금 출연자 이야기… 이렇게 하나하나 풀다보니 어느새 훌쩍 한시간이 흘렀다.
‘아름다운 한국어’를 통해 두 외국인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일은 아주 쉽진 않았다.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어려운 한국어들 – 예를 들면 ‘조직구조’라는 단어나 ‘모금’이나 ‘배분’이란 단어는 영어단어는 알고 있지 않았다 – 에 대해서는 영어단어로 찾아 설명해야 했다(고마운 네이버 어학사전;;;;). 그들이 모르는 한국어가 나오면 나는 영어단어로 설명하고, 내가 영어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우면 그들이 한국어를 찾아보기도 했다.
몰리나는 특히 ‘아름다운재단의 1%나눔’에 큰 관심을 보였다. 재단이 설립된 초기 ‘1%나눔’을 모토로 많은 시민기부자들이 월급의 1%, 용돈의 1%, 축의금의 1%, 내 재능의 1% 등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 1%나눔은 아름다운재단이 성장하는데 큰 주춧돌이 되었다.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와 <Sipar>
그녀는 “캄보디아는 빈부격차가 심한 편인데 가진 사람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자신의 것 중 작은 1%를 내어놓는다는 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작은 것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는지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캄보디아의 상황과 그녀가 일하고 있는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몰리나가 일하고 있는 시민단체 <Sipar | http://www.sipar-books.com/>는 ‘모든 국민들이 원활하게 읽고 쓰게 하기 위한 사업’을 하고 있는 NGO다. 전화통화에서 ‘도서관 사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을 때, 나는 우리나라의 도서관(지역 어린이도서관 사업 등) 사업 정도로 생각했다(아이들에게 양질의 도서를 제공하고 책읽기 문화를 만들어가는).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Sipar>에서 하고 있는 사업의 무게는 달랐다. 캄보디아의 시민단체에서 해야할 1순위의 사업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앙코르 와트’와 ‘킬링필드’
캄보디아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앙코르 와트’와 ‘킬링필드(Killing Fild)’가 아닐까. 찬란했던 시절의 증거물로 남은 앙코르 와트와 피로 얼룩졌던 크메르 루즈 정권의 대학살. 그 중에서도 역사 속의 사건이라고만 생각했던 킬링필드가 캄보디아에서는 여전히 얼룩진 역사로 남아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설명은 달랐다.
“1975년에서 1979년까지 크메르 루즈 정권 아래서 200만명이 죽었어요. 수많은 지식인, 학자, 교육자가 죽고 경제가 무너졌어요. 그 이후 2차 세계대전이후 냉전시대가 계속 됐고 많은 지식인들이 망명했어요. 평화협정이 될 때까지 캄보디아는 다시 회복할 수 없었죠.”
전쟁과 학살로 수많은 지식인들이 죽게 되자 캄보디아에는 더이상 교육을 할 사람이 없었다. 전쟁 중에 90%의 교사가 사망했다. 언어를 교육할 주체가 사라지자 책도 출판되지 않았다. 수많은 아이들과 국민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고 책을 쉽게 구할 수도 없었다. 현재 캄보디아의 문맹율은 전국민의 40%에 달한다. 40여년 전의 역사의 상흔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Sipar>는 1982년에 생겼다. 냉전시대, 태국의 난민캠프 교육프로그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89년에 난민캠프에서 아이들을 위한 첫 도서관이 생겼고, 1992년에 본격적으로 캄보디아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Sipar>는 다양한 사업을 진행 중이다.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캄보디아에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책을 출판하는 일부터 학교, 마을, 병원, 수용소 등에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고 있다. 캄보디아에는 여전히 교통편이 원활하지 않은 많은 마을이 있어서 차량이나 오토바이로, 혹은 배낭에 책을 넣어 이동도서관을 운영하는 것도 <Sipar>의 중요한 사업 중 하나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몰리나는 재단의 지원사업 중에 ‘책날개를 단 아시아(자세히 보기)‘라는 사업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국내의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들을 위해 모국어책을 지원하는 ‘책날개를 단 아시아’ 캠페인은 종료되었지만, ‘변화의시나리오 도서관 특별지원사업’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몰리나는 “정말 의미있는 사업인 것 같다”라면서 기회가 된다면 이런 사업을 국내에서 진행하면 좋겠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만약 이와 같은 사업을 진행한다면 <Sipar>에서 출판한 양질의 서적들을 국내의 캄보디아 이주민들에게 지원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훌쩍 두어시간이 흐르고.
몰리나는 아름다운재단 말고도 다른 몇개 단체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다른 국외단체를 방문해 조사하고 <Sipar>의 사업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를 보니 감동이었다. 오직 다른 단체를 통해 더 많은 걸 배우고 또 자신들의 사업을 알리기 위해 외국의 단체에 방문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몰리나의 모습을 보니 내 자신이 그간 너무 안일해졌던 것은 아닌지 하는 반성도 됐다.
돌아가는 길, 몰리나와 마이클스는 함께 사진 촬영을 했다. 큰 도움이 되었노라며 “캄사합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라고 환하게 인사하는 몰리나.
괜히 미안한 마음에 “몰리나, 다음에 한국에 한 번 더 방문했을 때는 제가 조금 더 편안하게 영어로 안내할게요“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이 기회에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전화영어나 다시 시작해야겠다;;; 열심히 하다보면 나에게도 레벨10의 날이 오겠지….
아름다운재단의 1%나눔은 내가 나눌 수 있는 가장 작은 것, 누구나 쉽고 편하게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나눔, 그러나 함께 모이면 큰 힘이 되는 나눔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샘
첨엔 지애킴으로 읽다가…음 내얘기군요..So Sor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