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은 공익활동을 하고자 하는 시민모임, 풀뿌리단체, 시민사회단체를 지원합니다. 특히 성패를 넘어 시범적이고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함으로써 공익활동의 다양성 확대를 꾀합니다. ‘2021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 너머 어떤 분들이 일하고 계신지 만나보았습니다. |
성격이 본래 공감을 잘하는 편이 아니기도 하지만, 함부로 공감하는 걸 지양하려 해요. 일부러 최대한 저 사람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제 얘기가 아니라 남 얘기를 하는 것으로 먹고 살고, 그걸 대중에게 공감을 요청하고, 그 공감을 바탕으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제가 이미 저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에 대해 선공감하게 되면, 정말 저 사람들의 얘기가 제대로 전달이 되는걸까? 하는 마음이 들어요. 제가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있다면 다리를 충분히 설명하는 게 중요하지, 이 다리는 어때서 이건 이렇고 저건 이래라고 말하는 순간 코끼리는 사라지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소재가 되는 것 같거든요.
Q. 활동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A.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헌신적인 활동가’가 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할 수도 없을 것 같았고요. 공부로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대학원에 갔는데 세부전공이 근로자 복지였어요. 노동자 정신건강, 직무 스트레스 쪽에 관심이 있어서 실습처를 알아보다가 노동건강연대를 소개 받았습니다. 실습이 끝날 때 쯤 하던 일이 여전히 진행중이었어서 마무리 짓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면 미안하니 돈을 받으라고 했어요. 그때는 제가 이게 ‘직장’이라는 걸 갖게 되는 거라는 것도 몰랐어요. 돈 받고 일하면 좋으니까 그냥 했지요. 좀 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해 보이는 곳에 자리 하다 보니 여기에 있었어요. 그냥 하다보니까 하게 되었어요.
Q. 하다보니까 하게 된 일터에서 벌써 4년이나 계셨어요.
A. 같이 일하는 분들로부터 적절한 피드백과 보상을 받았어요. 작은 조직의 특성일수도 있지만 초반부터 묵직한 일이 맡겨지기도 했는데, 같은 연차의 직장인에 비해 자율성이 부여되는 조직이라 저한테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일도 성향상 저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고요. 본래 배우는 걸 좋아하는데 제가 하는 일이 주로 그런 일들이었고, 지혜나 판단이 필요할 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면에서 저에게 좋은 조직이고, 저에게 좋은 활동을 지금까지 하고 있고 인터뷰까지 하고 있네요.
Q. 그럼에도 힘들다고 느껴지는 때는 언제인지 궁금해요.
A. 루틴한 일보다는 높낮이가 있는 일을 좋아하는 타입이에요. 저는 당사자가 아니어서 현장에서 만나고 듣고 기록하고, 그걸 기반으로 말하는 일을 해요. 그건 제가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한데, 그 과정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로 토론회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글도 쓰다보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하는 공허한 이야기가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 토론회도 인터뷰도 사실은 모두 노력한 성과인건데 다 별 볼 일 없게 느껴지는 때가 있어요. 지난해에는 코로나 시국이 겹쳐서 바깥에서 활동하는 게 어려워지기도 했고 루틴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감정도 그런 상태가 지속되다가, 연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 국면이 되면서, 이일 저일 하다보니 새해가 되어있더라고요.
Q. 결국 바쁨으로 극복하셨군요.
A. 활동가는 의미를 가장 높은 보상책으로 갖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활동가도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일을 꼭 의미 있어서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힘들 때도 있고 의미 없는 일을 할 때도 있어요. 가치가 있고 필요한 일이고, 굳이 누군가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해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약간의 번아웃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극복했습니다(웃음).
Q. 2019년부터 매달 산재 사망과 관련한 통계를 정리해서 올려주고 있어요. 가치있고 필요한 작업이지만 참담해서 힘든 작업일 것도 같아요.
A. 그런 면에서 제가 가진 큰 장점은 거리두기를 잘 한다는 거에요. 타인에 대해 공감이 되게 좋은 분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렇지가 않아요. 물론 사례를 맡으면 안타깝고 뭐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뭔가를 하지만, 다음 일을 시작하면 그 전을 잘 잊고 잘 떠나는 것 같아요. 뭐랄까, 언제나 제 3자 같아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는데.
Q.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오래 이 일을 하는 데 굉장히 큰 강점 같아요.
A. 영화 같은 데 보면 활동가라고 하면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고, 실제로 주변에 그런 분들도 많은데 저는 그렇게 따뜻하진 않은 것 같아요.
큰 물은 천천히 끓잖아요. 식는 것도 천천히. 제가 좋아하고 본받고 싶은 분들은 되게 뜨거우면서도 냉철한 분들이 많아요. 온도를 꾸준하게 유지하는 게 덕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래 성격인 부분도 있지만 저도 항상 중간에 있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Q. 활동가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이 정도는 지키면서 살겠다! 하는 것이 있다면요?
A. 경력이 쌓이면서 아는 것도 많아지고, 위치가 달라질 수도, 또 어쩌면 제가 귀가 막혀서 들리지 않는 때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내 입을 닫고, 배우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 계속 있고 싶어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도 그곳에 머물면서요.
Q. 선생님이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주로 어떤 분들인가요?
A. 일반적으로 본받거나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하면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거나 사회적으로 명망을 얻은 사람들이잖아요. 저도 훌륭한 사람들의 인생사나 그분들이 쓴 글들을 많이 읽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이나 경험은 오히려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요.
20대 초에 한 장애인 활동지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이분이 매일 술을 거의 2-3병씩 마셔요. 재주가 많은 형이었는데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무슨 생각으로 왜 저렇게 사냐, 생각했어요. 곁에 있다보니 이해되는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형이 당시 40대였는데, 이미 수십 번의 노력이 있었고, 본인이 가진 장애와 그밖의 조건 때문에 그만큼 좌절했던 경험의 결과였던 거에요. 저는 당시 별 다른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니고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사회적으로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거죠.
노들야학에서 만났던 지체, 중증장애인 분들이 저에게 주었던 물음표들을 노동건강연대에서 산재노동자분들을 통해 똑같이 마주했고, 계속해서 저한테 확신보다는 물음표를 주는 사람들을 귀를 닫지 않고 만나면서 그분들과의 호흡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요.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도 많은 것들을 바꿔가거나, 그럴 힘을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 제 지식과 경험으로 재단할 수 없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들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 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Q. 산재사고와 관련해서 변화가 있을까요?
A.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고 해서 사회가 안전해진 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사 이후에 많은 사람들의 근저 속에서 있었던 인지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어요.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그런 인식의 변화 때문에 이슈가 커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산재 사망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법이 제정되었어도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 위험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처지는 크게 바뀐 게 없거든요. 사망사고도 여전할 거에요. 하지만 산업재해를 막고 예방해야 하는 것이 누구의 책임이냐의 관점으로 봤을 때, 과거에는 개인이 조심하거나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게 공부를 잘했어야지, 하는 시각이었다면 이제 국가나 기업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시각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노들장애인야학을 먼저 찾은 사람. 야학의 특성상 아마 최연소 활동가였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것, 있을 곳을 아는 분 같아 인터뷰를 하기 전부터 어쩐지 이제까지의 모든 걸음이 무심하지만 자연스럽고 적확할 것이라 짐작하였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쌓아간 것들은 사람에 대한 애정어린 호기심과 성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터뷰중에 여러 번 본인을 ‘냉정하다’ ‘거절을 잘하고 성격이 좋지 못하다’고 해서 깜빡 속을 뻔 했다. 누군가의 삶과 이야기를 그 자체로 존중하고 싶어서 한 발 물러선 사람의 시선을, 어느 누가 차갑다고 할 수 있을까. 설사 그의 말마따나 섣부르게 코끼리 전체를 판단 해 버린거라고 하더라도. 여하튼, 여러분 필자가 만난 코끼리 다리는 이렇습니다 여러분
비정규직, 알바, 이주, 여성, 하청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위해 연대합니다
노동건강연대 http://laborhealth.or.kr/
글, 사진| 박혜윤
전(前) 변화의시나리오 담당자 / 귀 기울여 듣고 애정을 담아 질문하고 싶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