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재단 1호 기금 출연자.. ‘김군자할머니기금’으로 대학생 250여 명에 장학금 지원
– 빈소 찾은 장학생들 “사회에 자리잡은 것은 할머니 덕분, 잡아주신 손 너무 따뜻했는데…”
아름다운재단 1호 기금출연자 김군자 할머니가 지난 23일 오전 타계했다.
김군자 할머니는 17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고 귀국한 뒤에도 어렵게 살아왔지만, 아름다운재단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 기부를 이어갔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4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 2007년에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미국 하원결의안 청문회에서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김군자 할머니의 기부는 지금의 아름다운재단을 성장시킨 씨앗이 됐다. 김 할머니는 지난 2000년 8월 아름다운재단이 창립된 직후 5천만원을 기부해 ‘김군자할머니기금’을 만들었다. 장례식 비용 500만원만을 남긴 채 평생 모은 돈을 장학사업을 위해 내놓은 것이다. 김 할머니는 이후 2006년 다시 5천만원을 추가 기부해 총 1억 원의 돈을 기부했다.
13살에 부모를 여읜 김군자 할머니는 8개월 동안 야학에 다닌 게 평생 배움의 전부였다. 그래서 청년들이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보육시설을 퇴소한 대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한 것이다. 당시 김 할머니는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이 배울 기회만이라도 갖도록 돕고 싶다”고 기부 동기를 밝혔다.
이 같은 기부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시민들이 뜻을 보탰다. 2017년 7월 현재 ‘김군자할머니기금’의 누적 모금액은 약 11억원에 달하며, 함께 하는 기부자도 709명에 이른다.
지금까지 ‘김군자할머니기금’을 통해 장학금을 지원받은 학생들은 약 250명에 달한다. 언론보도 등을 통해 김 할머니의 소식이 알려진 뒤 장례식장에는 장학생 출신의 조문객들도 눈에 띄었다.
23일 빈소를 찾은 장학생 노진선(30)씨는 “절박한 상황에서 장학금을 받았는데, 김군자 할머니가 조성하신 기금이라는 걸 알게 됐다”면서 “어떤 돈인지 알기에 더욱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 덕분에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정도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면서 “부디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고 감사와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김군자 할머니는 이외에도 2015년에 그동안 모은 1억5천만원을 자신이 다니던 경기도 광주시 퇴촌성당에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같은 해 네팔에서 대규모 지진이 났을 때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함께 구호단체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당시 김 할머니는 아름다운재단 간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통장 잔고에 20만원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 할머니는 남을 돕는 일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늘 입버릇처럼 “나에게 쓰는 것은 그렇게 아까운데 남에게 주는 것은 하나도 안 아깝다”고 말했다. 또한 “돈이 많은 사람은 더 채우려고 하고 돈이 적은 사람이 주변을 돕는다”면서 “돈만 많아서는 안 되고 돈 쓰는 가치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름다운재단은 이 같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3년 5월 아름다운재단 사옥 1층에 김군자 할머니의 기념부조를 설치했다. 또한 매년 할머니의 생신이나 추석·설날 등의 명절 때마다 할머니가 계신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지난 5월 생신 때 아름다운재단 간사들을 만난 김 할머니는 “내 삶이 한스러울 때가 많았지만 돌아보니 가진 것을 다 줘서 후회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현아 아름다운재단 나눔사업국장은 “환하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김군자 할머니의 타계는 믿기 어려운 슬픔”이라면서 “아름다운재단 전 간사가 한 마음으로 할머니를 추억하며 그리워하고 있다”고 애도를 표했다.
김현아 국장은 “김군자 할머니는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아름다운재단의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셨다”면서 “앞으로도 할머니의 정신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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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30일 ‘김군자할머니기금’ 전달식에 참여한 김군자 할머니
2015년 생신파티에서 아름다운재단 간사들과 함께 한 김군자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