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없는세상]이 2021 변화의시나리오 스폰서 지원사업에 참여하여 병역거부 교육영상을 제작했습니다.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에서 보내온 사업후기입니다. <변화의시나리오 스폰서 지원사업>은 공익컨텐츠의 생성과 확산을 위해 5인 이하의 소규모 단체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
“이거 우리가 20년 전에 했던 이야기 아냐?”
병역거부 교육 영상〈양심적 병역거부 핵심 톡톡〉시리즈의 시나리오를 본 동료가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이 영상에 담긴 내용 중에 새로운 것은 없다.
“20년 전에 했지. 그렇지만 20년 전에 태어나신 분들, 다시 말하면 이제 군대 가고 병역거부 할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 20년 전에는 못 들었잖아.”
농담처럼 대답했지만, 병역거부 교육 영상 콘텐츠를 만든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20년 전부터 전쟁없는세상이 주구장창 해 온 이야기들, 꾸준히 해왔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하지 못한 그 이야기들을 지금 시점에서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콘텐츠가 필요하다! 병역거부에 대한 한국어 자료가 거의 없던 20년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찾아보면 제법 책도 있고 논문도 있다. 이 자료들은 대부분 깊이 있게 파고들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자료지만 당장 군 입영통지서를 군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먼 이야기다. 게다가 의미 있는 자료지만 재미가 없어 사람들이 쉽게 찾아보지 않게 된다.
두 가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병역거부가 군 입영을 앞두고 병역거부를 궁금해 하거나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실제 필요한 정보와 생각할 거리를 주는 내용, 그리고 지금 입영을 앞두고 있는 20대 초반과 곧 입영 대상자가 될 10대 후반인 사람들이 재밌게 볼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내용에서는 병역거부의 역사와 한국 사회에서 병역거부의 의미, 쟁점을 보여주기로 했다. 예전 자료들은 대부분 법적인 논리 혹은 대체복무제도에 대해 행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인권적인 측면에서 양심의 자유를 논의하는 책과 논문들이 있었지만, 전쟁에 저항하는 평화적 실천으로서 병역거부의 역사와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자료는 많지 않았다. 특히 병역거부가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쟁점들 “군대 안 간 사람은 비양심이냐?”, “남북 대치 상황에서는 병역거부 인정은 시기상조 아닌가요?”, “다들 병역거부 하면 나라는 누가 지키나요?” 같은 질문을 다루기로 했다.
형식은 당연하게도 영상 형태로 만들기로 했다. 영상 매체에 익숙한 세대를 타깃으로 하기도 했고, 콘텐츠가 쉽게 퍼져나가기 위해서는 영상 형태가 적당했다. 문제는 영상 콘텐츠 제작을 해본 경험이 많지 않은 것이었다. 다행히도 대체역 심사를 준비 중인 병역거부자 중에 영상 작업을 하는 분이 있었다. 자신이 병역거부를 고민한 만큼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무엇보다 자신과 비슷한 고민과 경험을 할 사람들을 위한 영상을 만드는 일이라 열의가 넘쳤다. 몇 차례의 회의를 걸쳐 영상의 콘셉트를 잡았다. 처음에는 배우를 섭외해서 꽁트 형식으로 내용을 전달하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코로나가 심각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촬영을 하기 어려운 점, 여러 사람(배우들과 촬영 스태프)의 스케쥴을 맞추는 게 어렵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각자 참고가 될 만한 영상 레퍼런스를 찾아와서 논의하면서 다시 콘셉트를 잡았다. 배우를 대신해서 레고를 활용하기로 했다. 레고를 이용한 모션 애니메이션은 배우들의 스케쥴을 관리해야 하고 촬영하는 날의 날씨나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 꽁트 형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약사항이 없었다. 애니메이션의 배경은 촬영편집 감독을 맡은 병역거부자가 직접 하기로 했다.
다만 걱정인 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빠진 자리에, 영상의 퀄리티를 담보하고 중심을 잡아줄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감독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서 내레이션을 전문 성우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이다보니, 이름이 알려진 성우들이 과연 이 일을 해줄까 걱정하면서 주변 활동가들에게 수소문해봤다.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에도 출연했고 여러 CF와 방송에서 목소리를 알려왔던 김상현 성우님을 소개 받았고, 의외로 흔쾌히 작업에 동참해주셨다. 프로 성우를 섭외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가편집본 형태에서 성우님의 목소리 내레이션을 넣으니 영상의 느낌이 확 달라졌다. 낮고 중후한 보이스 컬러가 신뢰성을 높여주었다. 나름 강한 주장을 담은 콘텐츠라 보는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내용을 전달해주니 그런 거부감도 훨씬 줄어들 것만 같다.
그렇게 다섯 편의 레고 모션 애니메이션 영상 콘텐츠가 탄생했다. 평화활동가들과 주변의 20대 초반 청년들에게 물어보면 예상 이상의 퀄리티에 놀랐다는 반응을 보여준다. 그러나 늘 문제는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든 콘텐츠를 어떻게 널리 퍼뜨리느냐이다. 유튜브에서 유료 광고를 했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신통치 않았다. 병역거부를 고민하거나, 진보적인 의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좋은 평가를 받지만, 병역거부에 대해 잘 모르거나 관심이 크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이 영상들이 어떻게 보일지도 궁금하다. 과연 이 영상이 병역거부를 알리고, 입영을 앞둔 사람들이 병역거부에 대해 관심 갖게 할 수 있을까?
꽤 괜찮은, 재밌고 유익한 영상 콘텐츠를 만들었다는 기쁨도 잠시. 이걸 어떻게 활용하고 널리 퍼져나가게 할지 생각해야 하는 과제가 새롭게 남았다.
글 : 전쟁없는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