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도 일곱 번 넘어지면 일곱 번 넘어지는 거잖아요?
등장만으로 변화의 상징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미디어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인데요. 백인 인형이 주를 이루는 어린이 프로그램에 등장한 아시아인 인형, 청각 장애인으로 나오는 마블 히어로, 인슐린 주입 장치를 달고 있는 어린이 캐릭터… 소수자의 존재를 친숙하고, 낯익게 만드는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전형성을 탈피해나가는 노력도 이어가게 되고요.
보육원을 나와 자립을 이어가고 있는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 손자영 씨는 미디어 속 ‘고아’ 캐릭터의 전형성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아’ 캐릭터는 한국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클리셰인데요. 캐릭터 공식이 존재하다고 보여질 만큼 유형화되어 있습니다. 지독한 악인 혹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신데렐라,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캔디처럼요. 편견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또 편견이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9월 3일 열린 ‘MZ세대, 열여덟 어른의 내일을 말하다’ 토론회 현장을 들여다보고 왔어요.
미디어 속 편견은 티비 앞 당사자를 겨누는 화살이 될 수 있어요.
자영 씨는 토론회에서 미디어/언론 및 사회복지를 전공한 청년들과 함께 미디어 속 ‘고아’ 캐릭터에 담긴 고정관념의 원인과 개선방안을 이야기했어요.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신선 씨와 신한대학교 미디어언론학과, 사회복지학과 학생들 각각 발제를 맡았습니다.
자영 씨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고아’ 이미지가 미디어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짚으며 토론회의 문을 열었습니다. 스타트업 닉핏의 도움을 받아 데이터 조사를 진행해보니 실제로 ‘고아’ 이미지를 만드는 데는 미디어의 영향력이 상당했습니다. 특히 가난, 폭력, 불행, 불량, 비행 등의 고정관념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었는데요. 자영 씨는 고정관념이 당사자들에게도 뿌리 깊이 새겨졌다고 말합니다.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도 양육자도 그런 고아 캐릭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TV 속에서 나왔던 대사들은 저희 현실 생활에서도 많이 들렸었어요. 양육자분이 저한테 ‘이래서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야’라는 말을 했었고요. 저희끼리 싸울 때도 ‘나는 부모님이 있는데 너는 진짜 부모님 없는 (앞에 또 생을 붙여서) 생고아잖아.’라고 서로를 비난하는 말들을 했었죠. 그 말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 향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편견이 두려워 숨는 자립준비청년들이 있습니다.
보육원을 나온 뒤에도 사람들이 자신을 미디어 속 이미지로 바라볼까 두려웠던 자영 씨는 편견이 두려워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신선 씨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당사자들 50명 중 27%는 보육원 출신인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해요. ‘괜한 편견이 생길 것 같다’라는 이유가 대부분이었고요.
“주민센터에서 처음 기초생활수급자를 신청했을 때 공개된 자리에서 말을 하는게 너무 어려웠어요. ‘보육원에서 자랐고, 돈이 없어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러 왔다.’는 말을 해야 했으니까요. 실제로 말 안 하고 도움 안 받는다는 친구들도 있고, 스스로 고립되거나 자립을 더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친구도 분명히 많거든요. 그 근원은 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거에요.”
자영씨는 편견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미디어 속 ‘고아’ 캐릭터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운재단에서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로 활동하며 미디어 캐릭터 공식을 조사했고, 편견이 있는 장면을 패러디해서 바꿔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형성이 아니라 다양성이죠.
무수한 드라마를 들여다본 끝에 ‘고아’ 캐릭터의 전형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방영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드라마도 있었지만, 최근 방영된 것들도 많았는데요. OTT 채널과 함께 콘텐츠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보니 ‘고아’ 클리셰 또한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 또한 큽니다. 실제로 콘텐츠들끼리 맞붙으면서 캐릭터 역시 좀 더 극화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론회에 참석한 신한대학교 미디어언론학과, 사회복지학과 학생들도 드라마의 극적인 요소 위해 잘 먹히는 콘텐츠를 위해 ‘고아’ 클리셰를 자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한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독보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인물과 내용이 흥미롭고, 관심이 생겨야 시청자들이 쭉 이어서 보기 때문이죠. 미디어가 소수가 겪는 고충이나 갈등을 더욱 이용하는 이유 아닐까요.” 미디어언론학과 권민지 씨
토론회 참석자들은 “미디어를 소비하는 사람들도 캐릭터성이 없으면 쉽게 소비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는데요.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기에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인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형성을 벗어날 수 있는 건 결국 다양성이란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 <스타트업>에서 한지평 캐릭터는 정형화된 ‘고아’ 캐릭터가 아닌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하나의 평범한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서른, 아홉>의 차미조도 캐릭터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내고 과거의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마냥 긍정적인 캐릭터가 또 다른 공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는 점도 이야기되었지만 ‘고아’에 대한 두터운 편견을 해소하기까지는 일정 부분 필요한 지점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머리 속 그림을 바꾸면, 변화가 시작될 거예요.
“고정관념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그림이다. (중략) 일종의 착각이지만 그 영향은 꽤 강력하다. 일단 마음속에 들어오면 일종의 버그처럼 정보처리를 교란시킨다. 결과적으로 고정관념을 점점 더 확신하는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사례를 보더라도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는다.”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 중
자영 씨는 대중들이 다시 그려준 미디어 패러디 일러스트를 모아 미디어 종사자들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미디어가 그려낸 편견은 실체가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죠. 자영 씨가 만들어 나갈 변화에 힘을 더하고 싶다면, 함께 그려봐도 좋을 것 같아요. 가장 빠른 변화는 자신의 편견을 깨는 데서 시작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