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희의 꿈
<최성욱 이른둥이>
병원에서는 조산기가 있다고 했다.
삼일 전에도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오후 5시. 회의를 준비하고 있던 성욱이 아빠는 모든 걸 포기하고 천안에서부터 충주까지 달려왔다. 동네 병원에서는 “만일의 상황을 생각해서” 대학 병원으로 옮기라 했다. 마침 성욱이는 엄마의 배속에서 나오려던 참이었다. 조산이지만 그래도 30주를 채웠으니 별 문제가 없을 거라 모두가 기대했다. 대학병원에 왔지만 의사는 없었다. 출산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성욱이가 자세를 바꾸었다. 조산에 난산인 상황이었다. 출산 과정에서 성욱이의 어깨뼈가 부러졌다. 또 문제가 있었다. 성욱이가 울지 않았다. 폐가 제대로 펴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런데도 병원에서는 성욱이에게 시설물 사용을 허가하지 않았다. 급한데로 손으로 인공호흡기를 누르며 병원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가족캠프에서 흥겹게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최성욱 이른둥이. ⓒ아름다운재단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렸던 거예요. 인공호흡기나 인큐베이터가 한두 대 남더라도 병원에서는 그냥 놀린다는 거예요. 원래 이 병원을 다니던 단골 산모의 애가 어떻게 태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죠. 결국 서울에 있는 병원을 수소문했어요. 강남 성심 병원에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애 아빠가 성욱이를 데리고 구급차를 탔죠.” 5시 30분경에 태어난 성욱이는 결국 10시가 다 되어 충주에서 서울로 출발했다. 밤새 성욱이 곁을 지키던 아버지는 새벽이 되어 천안으로 출근을 했다. 그 다음날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한 엄마가 성욱이를 돌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엄마는 출산 후 산소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에게 장애가 생길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70일간의 인큐베이터 생활이 끝났다. 엄마는 충주로 돌아가는 대신 인천의 한 재활 병원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성욱이와의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8년 8월 시작된 입원 생활. 큰 딸 도희는 친척집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친척집에 사정이 생겨 다시 충주로 내려왔다. 대신 엄마는 성욱이를 위해 매일 아침 충주에서 대전행 버스를 탔다. 대전에 좀 더 신뢰가 가는 재활 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천안에서 회사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엄마는 일주일에 여섯 번 대전을 갔다. 그렇게 성욱이는 2012년 3월 9일까지 만 3년을 장거리 재활 치료를 다녔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수도 없었다. 엄마는 다시 인천에 있다는 재활 병원을 찾았다.
가진 게 넉넉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치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것을 사치와 허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엄마’를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는 단지 아이가 올바르게 성장해서 한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름다운재단
“병원에서도 얘기를 해요. 소아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소아전문병원은 문 닫는 경우가 많다고요. 너희는 돈이 안 되지만 내가 사회 봉사하는 차원에서 운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원장님도 있었어요. 가령 소아는 치료를 많이 해요. 기본적으로 하루에 3번에서 5번은 해요. 성인은 2번 밖에 안 하거든요. 그럼 똑같은 치료사를 두고 더 많은 의료비를 받을 수 있죠. 그래서 소아전문 병원 수가 적어요. 지방으로 가면 갈수록 수효가 적고요. 그래서 지방 사시는 분들이라도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오는 거예요. 재활 프로그램에 대한 신뢰도 그렇고, 또 서울에 선생님들이 더 많으시니까. 인천만 해도 병원들이나 기관에 여유가 있어요, 그런데 다른 병원들은 2~3개월 있으면 자리를 비워줘야 해요. 환자도 회전을 시켜야 하구요. 그런 걸 뭐라고 할 수 없는 게, 대기하고 있는 애들이 많아요. 만약 누가 들어가서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 다른 애기들이 치료를 받을 수가 없어요. 병원 수가 그만큼 적다고 봐야죠. 세브란스 병원 같은 경우는 딱 3주 3일만 입원이 가능해요. 그런데 우리 성욱이가 의사 선생님들하고 눈 맞추고 적응하는 데 3주가 걸려요. 그래서 포기했죠. 그래도 거기는 재활에 대한 시설이나 신뢰가 알려져 있어서 가고는 싶었어요.” 인천에서 서울로 다시 부천으로 엄마는 성욱이를 데리고 병원을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 성욱이 몸을 잘 잡아주겠다는 선생님이 있으면 그를 따라 병원을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재활 치료에 대한 열정보다는 자신의 명성과 인기를 위해 환자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짐도 점점 늘어났다. 병원을 수개월에 한 번 옮기는 것은 이사를 하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그 와중에서도 성욱이는 꾸준하게 성장했다. 엄마의 힘이었다. “언어치료를 생후 8개월부터 시작했어요. 옹알이를 하면서 구강마사지 식으로 먼저 시작했어요. 그 때 언어치료를 해서 말이 조금 빨리 나왔어요. 요즘은 표현력이 더 많이 늘었어요.” 가진 게 넉넉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성장에 필요한 치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것을 사치와 허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엄마’를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는 단지 아이가 올바르게 성장해서 한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게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만이 온전히 이 어려운 치료 과정을 떠안기에는 부담이 만만치 않다.
“저는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들이 함께 지냈으면 좋겠어요. 성욱이가 얼른 잘 걸어 다녔으면 좋겠네요. 도희는 지금 일산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해요. 성욱이가 조금 걷기만 하면 내려가서 지낼 계획도 있어요. 그래도 성욱이가 다리에 힘이 많이 붙었어요.”ⓒ아름다운재단
“언어치료, 심리치료, 인지치료와 같은 진료는 보험이 되지 않아요. 그게 부담이 많이 됩니다. 30분에 3만 5천원. 거의 매일 받다 보니, 한 달에 80 만 원 정도의 비용이 나가요. 정말 이런 치료들이 아이들에게 필요하지만, 이런 부분은 지원이 되지 않아요. 바우처 제도가 있긴 해요. 가정별 소득에 따라 한 달에 16만원에서 22만원 차등 지원을 해줘요. 그런데 적용되는 치료기관이 제한되어 있어요. 소위 ‘잘 나가는 병원’ 같은 경우는 이런 바우처 제도가 필요 없고요.” 2012년 1월 13일. 성욱이 엄마는 일산에 방을 하나 얻었다. 큰 딸인 도희 때문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성욱이에게 신경을 쏟는 동안, 도희는 줄곧 할머니 손에 맡겨져 있었다. 엄마는 도희의 심리적인 불안정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고 싶었다. 세식구는 아침에 함께 집을 나선다. 오후 5시에 성욱이 치료가 끝나면, 6시가 다 되어 도희가 유치원에서 돌아온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면 성욱이 엄마의 하루 일과가 비로소 끝난다.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챙겨줄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 “저희는 전화요금도 많이 나와요. 영상 통화가 잘 되니까. 성욱이가 무슨 일만 있으면 아빠랑 영상 통화를 해요. 주말이 되면 아빠가 일산으로 올라와요. 사실, 남편이 안쓰러울 때가 많아요. 전화 통화도 많이 하고 의사소통도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우리 이야기를 많이 안 해요. 애들 이야기가 제일 많고 직장 이야기 많이 해요. 불만이 있어도 서로 힘드니까 사실 말을 잘 안 꺼내게 되죠. 그런데 서로 안쓰러운 마음이 있어서.” 성욱이 아빠는 조심스럽게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저는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들이 함께 지냈으면 좋겠어요. 성욱이가 얼른 잘 걸어 다녔으면 좋겠네요. 도희는 지금 일산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해요. 성욱이가 조금 걷기만 하면 내려가서 지낼 계획도 있어요. 그래도 성욱이가 다리에 힘이 많이 붙었어요.” 며칠 전에 도희가 꿈을 꿨다고 했다. 그 꿈에서 깬 도희가 엄마랑 아빠랑 성욱이랑 다 같이 함께 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했다. 다 같이 모여 사는 꿈. 비단 도희 뿐만이 아니다, 아픈 아이를 안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녀야 하는 모든 가족들의 소망이기도 할 것이다. 이들은 같은 소망과 같은 꿈을 먹으며 산다. 비록 지금은 서로 떨어져 지내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니까.며칠 전에 도희가 꿈을 꿨다고 했다. 그 꿈에서 깬 도희가 엄마랑 아빠랑 성욱이랑 다 같이 함께 살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했다. 다 같이 모여 사는 꿈. ⓒ아름다운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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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맘
도희와 가족들이 꿈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성욱이도 건강해지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