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길을 달리다

김승준 이른둥이 이야기

 

임정화 씨는 아들인 승준이를 만나기 위해 대구의 집에서 부산의 병원까지 매주 2회 기찻길에 오른다. 그녀는 반년쯤 전 이른둥이 쌍둥이를 출산해야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겨우 인큐베이터 두 자리를 찾아낸 곳이 부산이었다. 당시 쌍둥이는 생명마저 위태로웠지만 다행히도 동생인 승민이는 석 달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형인 승준이는 치료가 절실했기에 정화 씨는 주중에는 홀로, 주말이면 남편 김진인 씨와 함께 부산의 승준이한테 떠나는 거였다.

 

그 곁에 내내 머무르고 싶은 모성이야 오죽하랴. 하지만 그녀는 집에 있는 승민이도 보살펴야 하는 엄마였으므로 못내 안타까운 심정을 억누른 채 기차에 몸을 싣고 이제나저제나 엄마의 길을 달릴 뿐이다.

 

생명의 잉태는 곧 엄마의 탄생

 

사진은 글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결혼한 지 4년째. 그토록 꿈꾸던 생명을 인공수정으로 잉태할 수 있었다. 세쌍둥이였다. 하지만 감격을 만끽할 새가 없었다. 의사는 셋 다 위험하니 한 생명의 포기를 권유했다. 도무지 도리가 없어서 한 아이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그 후였다. 애써 태교에만 집중하려 했건만 원인 모를 하혈이 멈추지 않았다. 한 달 만에 승준이의 양수는 말라 버렸고, 승민이 역시 위험에 처했다. 이쯤 되자 산모도 위급했기에 결국 해산할 방도밖에 없었다. 임신 28주, 그 여름의 초입에 쌍둥이는 초극소 저체중아로 탄생했다. 승준이가 980g, 승민이가 1040g이었다.

 

“승준이가 특히 폐랑 관련된 부분이 다 안 좋아요. 아마 출산하고 한 달쯤 됐을 거예요. 승준이가 숨도 못 쉬고 산소포화도가 심각하게 떨어져서 약물로 일주일 동안 억지로 재웠거든요. 그때 승준이 온몸이 퉁퉁 붓고, 옆에서 지켜보기 많이 힘들었어요.”

 

오로지 엄마의 이름으로 승준이를 살려만 달라고 두 손 모아 절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이제껏 동맥관 개존증 수술을 비롯하여 망막 병증이나 뇌출혈 등의 병상들이 사그라지기까지 몇몇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승준이는 삽관한 산소 호흡기부터 떼어 내고 자가로 숨 쉴 수 있는 회복력이 시급했다.

 

“지금도 병원에서 전화가 오면 손이 덜덜 떨려요. 혹시 승준이한테 무슨 일 생겼나 싶어서요. 그래서 남편한테 대신 전화 받으라고 할 때도 많네요.”

 

엄마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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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승민이의 건강이 호전됐다. 승준이만큼은 아니었지만, 그간 승민이도 병과 치열하게 씨름했고 마침내 집으로 퇴원하기에 이르렀다. 정화 씨가 승준이를 방문하는 날이면 요즘 친정 엄마가 감사하게도 승민이를 돌봐주곤 한다. 그 덕에 그녀는 나름대로 안도하며 부산의 병원으로 기찻길을 나설 수 있다.

 

병원의 규정대로라면 신생아 면회 시간은 10분. 그러나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오는 모정을 병원은 모른 체하지 않았다. 병원은 전체 면회 시간인 11시부터 12시까지 정화 씨가 한껏 승준이를 마주할 수 있게 배려했다. 그렇다고 그 사무친 그리움이 어디 가시진 않는 법. 그녀는 승준이에게 직접 분유를 수유하며 아이를 30분이라도 더 들여다보길 고집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승준이는 여덟 번 분유를 먹으면 여섯 번은 토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저것 분유를 바꾸기도 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는 제가 수유한 분유를 먹고 토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기뻤죠.”

 

이는 사소한 뜻밖의 사건이 아니다. 엄마의 사랑이란 종종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정화 씨의 사랑으로 승준이는 더디긴 하지만 점점 나아지는 듯했다. 단지 그에 비해 하루하루 지날수록 경제적인 부담이 드는 실상은 감출 수가 없었다.

 

초고액 병원비로 인해 그녀는 이젠 한숨도 모자라 쓴웃음만 난다. 사실 임신하자마자 워낙 경황이 없었던 터라 따로 태아 관련 보험을 들 생각조차 못했다.

 

“신기하게도 아름다운재단은 제가 임신했을 때 광고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때 제가 이른둥이를 낳을지 누가 알았을까요. 문득 떠올라서 지원을 신청하긴 했지만 확신이 없었는데, 되니까 너무 감사하죠.”

 

승준이의 사랑은 원래 누구의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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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씨에게 있어 2013년은 다사다난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녀는 이전의 삶보다 현재가 훨씬 행복하다. 당연히 승준이와 승민이의 존재가 그 까닭이다. 때때로 병간호에 지칠 만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오히려 제 몸 젖히고 더한 모성애를 발현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어엿한 엄마의 형상이다.

 

“이제는 의사 선생님한테 여쭤 보고 승준이를 퇴원시키는 건 어떤가 싶어요. 승민이도 있어서 둘을 돌보긴 조심스럽긴 한데 아무래도 병원보단 엄마의 손이 다르긴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곧 승준이도 승민이처럼 포동포동 살쪘으면 좋겠어요. 승민이는 벌써 7㎏쯤인데 승준이는 아직 3㎏으로 비쩍 말랐거든요.”

 

눈물겹게 아름다운 4㎏의 소망. 정화 씨는 그 소망을 붙들었기에 승준이 앞에서 눈물 한 방울도 내비친 적이 없다. 혹시라도 승준이한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봐 꾹꾹 이를 악다물었다. 그리고 믿는다. 승준이의 오롯한 회복이 믿음대로 이루어지리라 굳건히 신뢰한다. 결코 세상이 막을 수 없는 엄마의 사랑을 심장에 아로새기고서 말이다.

 

훗날, 승준이가 유치원에서 색종이로 만든 꽃다발을 정화 씨에게 건네며 ‘엄마, 사랑해요’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승준이의 사랑은 원래 누구의 것이었을까.

 

올해 시작한 정화 씨의 엄마의 길, 지금처럼 사랑으로 내달린다면 승준이는 반드시 4㎏ 이상 살찌고도 남을 테다. 아무렴 그리하여 승준이 안에서 내일 피어날 그 사랑의 열매가 무척이나 기대된다.

 

글. 노현덕 사진.김흥구

 

*김승준 이른둥이는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를 통해 입원치료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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