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부터 걸어온 소중한 인연
김우리 김나라 이른둥이 이야기
낯선 땅에서 반려자를 만나다
옷깃 한 번 스치려면 전생에 수백 겁의 인연을 맺어야 한다고 했다. 백 년에 한 번씩 옷자락으로 슬어 집채만한 바위가 모래로 바뀌는 시간이 ‘1겁’이니 굉장한 시간이다. 그저 스치는 사람이 그 정도이니 부부와 자식은 얼마나 오랜 과거로부터 걸어온 사람들일지 가늠조차 안 된다. 김응관 씨에게 솔로몬 로비 씨와 쌍둥이 딸들이 그렇다.
“작년 2월 28일에 필리핀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2013년 12월 30일에 소개 받았으니 석 달 동안 솔로몬과 연애한 거예요.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화상채팅으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서로에 대해 하나둘 알아갈수록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잘 웃는 아내가 좋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소소하지만 가식 없이 배려하는 모습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결혼을 결심했다. 마흔넷의 김응관 씨도 스물아홉의 솔로몬 로비 씨도 적지 않은 나이었다. 서로 제 인연이라고 확신하자 이후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내의 결혼 이민비자(F-6)에 필요한 20여 개의 서류를 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하루빨리 자신들의 가계를 꾸리고 싶어 결혼식부터 치렀다. 비자가 나오려면 2014년 4월, 법무부에서 고시한 ‘결혼 동거 목적의 사증 발급에 필요한 기초 수준 이상의 한국어 구사 요건 고시’를 만족시키는 TOPIK시험(한국어능력시험) 1급 취득이나 세종학당 6개월 과정 이수가 뒤따라야 했지만 기다릴 수 없었다. 잠시 떨어져 지내더라도 서로가 서로의 반려자로서 자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 뒤라면 여유로운 마음으로 입국 과정을 준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이 제 뜻처럼 흐르진 않았다. 차근차근 필요한 단계를 밟으려는 찰나, 변수가 생겼다. 그들 부부에게 쌍둥이가 찾아온 것. 그 어떤 선물보다 값진 허니문 베이비였다.
“4월 초에 임신 확정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서로 늦은 나이라서 양가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쌍둥이라니요. 그 소식을 듣곤 어떻게든 빨리 한국으로 들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를 품고 한국 땅을 밟기까지
입덧이 심한 솔로몬 로비 씨에게 한국어능력시험은 험난한 산과 같았다. 맘 편한 친정에서 지냈으나 아이 아빠인 김응관 씨가 곁에 없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잦은 의료사고를 빚는 필리핀 내 산부인과에 대한 불신도 한 몫 했다. 임신 5개월엔 설상가상으로 쌍둥이 수혈증후군이란 진단까지 받아들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둘 중 한 아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데 여간 복잡한 게 아닌 결혼이민비자(F-6) 때문에 속이 타들어갔다. 재정능력, 주거, 건강, 전과기록, 어학능력은 물론 한국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하는 과정까지 마쳐야 하는데 그들 부부에겐 시간이 없었다. 입덧 하느라 양동이를 끼고 사는 솔로몬 로비 씨 상태로는 쌍둥이를 출산하는 게 버거웠다.
“답이 없으니 미치겠더라고요. 법무부장관에게 탄원도 내고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 헤맸죠. 자녀가 있거나 동거 직계의 재산이 차상위계층 이상이면 면제해 주는데 저희 경우는 해당되지 않으니 속상하고. 우여곡절 끝에 추석날 인터뷰하고 이틀 후인 10일에 입국했어요. 입국하자마자 동네 산부인과에 갔는데 괜찮대요. 안심했죠. 아내도 저도 한시름 놨다고 생각했어요.”
신뢰할 수 없는 병원에서 한 아이 당 400만 원의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암담한 상황을 벗어나니 살 것 같았다. 극도의 불안이 수그러들 즈음인 막달, 예정일을 한 달 여 앞두고 자궁 문이 열렸다. 자연분만을 원했지만 맥박이 200까지 올라 제왕절개를 선택했다. 11월 4일 쌍둥이는 각각 2.2kg, 1.9kg으로 세상과 인사했다. 별 문제 없다던 태동검사 때나 출산 직후와 달리 쌍둥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뭣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했고 24시간이 3시간 지난 밤 10시에 근처 종합병원으로 이동했다. 그때만 해도 몇몇 검사만 받으면 될 거라고 가볍게 여겼는데 역시나 그들 부부의 바람은 어그러졌다. 낮은 산소포화도와 패혈증 등의 병명으로 입원한 쌍둥이는 한 달 넘게 중환자실 인큐베이터에서 지냈다. 다행스럽게도 건강은 회복세였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이제 걱정은 병원비로 전이됐다.
“생후 24시간 이내에 중환자실에 입원하면 보건소에서 진료비를 지원해준다는 걸 몰랐어요. 출산했던 병원에선 알고 있었을 텐데 옮겨야 된다는 판단을 왜 그렇게나 늦게 했는지 알 수 없었죠. 3시간 때문에 지원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더라고요.”
한국어가 서툴뿐더러 이제 막 출산한 솔로몬 로비 씨와 계룡산국립공원에서 계약직 산악구조원으로 일하는 김응관 씨에게 병원비는 예상치 못한 재앙이었고 감당키 어려운 과제였다. 이쯤 되니 어째서 하는 일마다 발목이 잡히는지 답답했다. 맥이 빠져버리니 정보를 쥐고서도 제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생애 최초의 친구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
“병원에 면회 갔다가 아내가 먹고 싶다기에 그 앞 호떡집에 들어갔는데 거기 주인 할머니 며느리가 쌍둥이가 입원한 대학병원의 간호과장이더라고요. 딱한 우리 처지를 듣고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시겠다고 연락하셨고 그렇게 사회복지사와 연결됐어요. 아마 그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못 만났을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에 정말 기적적으로 닿았죠. 이상했어요. 며칠 전만 해도 출구가 없어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났는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게요.”
그것은 위로였고 응원이었으며 출구이자 비상구였다. 기부자들 덕분에 부부의 잔뜩 위축됐던 일상은 이완했고 이내 확장했다. 쌍둥이 ‘우리’와 ‘나라’도 조금 허약하긴 해도 큰 병 걱정 없이 퇴원 가능해졌다. 빈혈약, 영양제 등을 먹고 한 달 후 뇌초음파를 찍어봐야 알겠지만 특별한 소견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집에 온 지 석 달 동안 우리와 나라는 성장 중이다. 비록 또래보다 작지만 그들 나름의 속도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김응관&솔로몬 로비 부부의 이른둥이 쌍둥이 딸 우리&나라. 그들은 흔들리지 않을 땅에 뿌리 내릴 준비를 마쳤다. 부부는 쌍둥이라서 똑같이 키우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다른 부분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도록 지지하고 지원할 것이란다. 뭐든 두 배로 경험하고 성장하며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테다. 그리고 생애 최초로 우리&나라의 친구가 돼 준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의 여러 기부자처럼, 누군가에게 든든한 ‘친구’라는 인연을 선물하고 싶다. 희망을 안고 오랜 과거로부터 걸어온 사람으로 곁에 머물기를 바란다.
아름다운재단은 교보생명과 함께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기금을 토대로 ‘2.5kg 미만 또는 37주 미만으로 태어난 이른둥이 입원치료비 및 재활치료비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