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으로 품는 사랑
김영빈 이른둥이 이야기
“태명이 별이였어요. 건강하게 태어나서 엄마랑 아빠 사랑 받으면서 크자. 그렇게 수도 없이 얘기했죠. 큰 아이랑은 달리 태교를 제대로 못했어요. 그래서 더 미안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그거 말고 얘한테 뭘 바라겠어요. 이렇게 세상에 나와 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데.”
영빈이의 엄마 임희진 씨(34)는 항상 긍정적이다. 영빈이가 조산기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도, 인큐베이터에 있는 영빈이를 매일 면회 갈 때도, 그 와중에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도 밝게 웃으며 해야 할 일을 찾아 묵묵히 해내는 희진 씨다. 그리고 그 품 안에 영빈이가 안겨있다. 손에 쥐면 바스라질 것 같던 몸에도 살이 제법 붙었다. 영빈이의 크고 까만 눈이 엄마를 향해 울고 웃는다.
770g, 영빈이라는 선물연애 시절 먼 거리에도 매일같이 자신을 보러 와주는 남편 김세종 씨(38)의 끈기와 변하지 않는 심성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고 달콤한 신혼을 거쳐 든든한 아들도 낳았다. 큰 아이 혼자는 외로울 테니 동생을 하나 더 낳자 마음먹고 임신을 했는데 그게 영빈이었다.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요. 설레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확실한 진단 없이 다음 주에 다시 오라는 말만 하셨어요. 그리고 일주 후 절박유산이라는 판정을 받았어요. 아기집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상황이 반복됐고, 유산 방지제 주사를 맞으며 입원을 여러 번 해야 했어요.”
영빈이를 만나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세 차례의 입원과 반복되는 진통, 결국 이슬이 비치고 진통제도 듣지 않아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양수가 바닥을 드러냈고 아이가 태반을 깔고 앉아 있는 상태였다. 자연분만을 하면 아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에 희진 씨는 당연히 수술을 선택했다. 오랜 시간의 수술을 거쳐 영빈이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25주 2일, 770g의 초극소저체중아였다. 병원에서 가장 작은 아이였다.
“모든 게 기적 같았어요. 병원에서도 2년 전 더 작은 아이가 있었다고 말은 들었지만 저희에게는 영빈이가 제일 작아 보였어요.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이들 중에서도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매일매일 기도했어요 우리 건강하자, 견디자. 영빈이한테는 미안하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한 것 같아요. 아이는 아무 죄도 없는데 단지 조건이 안 맞아서,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조금은 힘들게 먼 길을 가야하잖아요.”
매일 건네는 응원의 말
산후조리도 마치지 않은 몸으로 희진 씨는 매일 병원을 찾았다. 아이들이 인큐베이터에 있어 모르는 것 같지만 엄마가 오는지 안 오는지 다 안다고, 가족들이 응원을 해줘야 아이가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하루도 거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일, 희진 씨는 영빈이를 향해 웃으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영빈이가 인큐베이터에 있는 동안 영빈이 앞에서 한 번도 울지 않은 것도 희진 씨의 애틋한 마음이었다.
“병실 앞에서는 절대 울면 안 된대요. 엄마가 울거나 약해지면 아이들이 다 느끼고 불안해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면회를 가면 대부분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되요. 새벽에 잠도 안 오고. 몰래 찍어온 사진을 보면서 ‘오늘은 잘하고 있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울죠. 그래도 병원에서는 한 번도 안 울었어요.”
엄마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영빈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엄마가 젖병을 물려주면 그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젖병을 세차게 빤다. 그 덕에 체중도 열흘 만에 300g이나 붙었다. 이제는 제법 감정표현도 잘 하고 가끔 신이 날 때면 춤을 추기도 한다. 그 모든 게 희진 씨에게는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바이러스에 취약한 영빈이를 위해 아침·저녁 간격으로 온도를 맞추는 일, 환기를 시키고 공기청정기를 돌리는 소소한 일상의 순간에도 영빈이가 집에 있다는 것이 새삼 느껴져 감사하다.
받아서 더 커지는 사랑“퇴원 전까지 힘든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요. MRI, 청력 검사를 하다가 약 부작용이 와서 경련이 오기도 하고, 탈장수술도 했어요. 탈이 난 오른쪽은 수술을 무사히 끝냈지만, 혹시나 반대 쪽에도 발생 할 수 있으니 다른 한 쪽도 늘 기저귀를 갈 때마다 확인을 해줘야 해요. 그래도 더 바라는 것은 없어요. 그저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픈 영빈이를 지키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심적 부담만큼이나 경제적 부담도 희진 씨에게는 큰 어려움이었다. 전기 기술자로 10년이 넘게 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근무하던 남편 세종 씨의 갑작스러운 실직까지 이어졌다. 영빈이를 남에게 맡길 수 없는 희진 씨 역시 당장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출산을 하고 아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치료비는 가정에 부담으로 고스란히 남게 됐다.
“원래는 둘째를 낳고 일 년 후에는 저도 일을 다시 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3년은 영빈이를 곁에서 지켜봐야할 것 같아요. 아이 아빠 혼자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야 하니…말하지는 않지만 부담을 많이 느낄 거에요. 영빈이의 태아보험도 만 3세가 되어서 정상아 판정을 받아야만 가능하대요. 정상아 판정을 받아도 전체적인 보장을 다 받는 건 어렵고 일부만 된다고 하고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듯, 곁에서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많은 걱정들이 반으로 그리고 다시 반으로 줄었다.
“걱정이 많았는데 아름다운재단의 도움을 받게 돼서 큰 부담을 덜었어요. 김포시에서 지원을 받은 것도 있고요. 다행히 남편도 다른 직장을 구해 곧 이사도 할 예정이에요. 지금 집이 결로가 심해 아이 건강에 좋지 않거든요. 이렇게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고 병원에서도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시니 다 잘 될 거라고 믿어요.”
힘든 길을 돌아 왔지만 이제 희진 씨는 영빈이 그리고 가족과 함께 작은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엄마가 동생만 예뻐한다며 심술을 부리던 큰 아이도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어린이집에서 오자마자 손을 씻고 세정제를 바른 후 동생에게 다가간다. 어느새 의젓한 형이 된 큰 아이가 영빈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영빈이를 키우면서 도움 주신 분들, 재단 분들 생각을 계속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영빈이가 잘 자라고 저희 형편도 나아지면 기부를 시작하고 싶어요. 저희도 이번 일을 겪기 전까지는 이른둥이들이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지 몰랐거든요. 작은 마음들이 하나씩 모여 이른둥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는다면 정말 좋은 일이잖아요. 작은 도움이라도 나누고 싶어요.”
엄마의 의지가 가장 중요해요영빈이를 유모차에 태워 밖에 나갈 때면 희진 씨를 보는 낯선 시선에 당황한 적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빈 유모차를 끄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도 하고, 너무나 작은 아기인 영빈이가 인형이냐며 물어오기도 했다.
“그런 일에 일일이 상처 받으면 안돼요. 엄마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죠. 엄마가 너무 불안하고 나약해지면 아이한테 그 기운이 돌아갈 수도 있잖아요. 제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매일 격려해주는 거죠. ‘너는 버틸 수 있어’라고요. 아이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는데, 배냇짓이라고 하죠?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배시시 웃어요. 제 마음을 다 알고 대답해주는 것 처럼요.” 엄마의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희진 씨의 눈이 반짝인다.
엄마의 세계가 넓으면 아이의 세계는 그만큼 넓어진다. 영빈이를 통해 또 다른 이른둥이들을 품고, 도움을 받은 곳과 친절했던 간호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희망을 얘기하는 희진 씨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엄마였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엄마를 가진 영빈이는 그 품안에서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랄 것이다.
글. 이경희 사진. 김흥구
임희진
네…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탈 없이 자라주는게 작은소망이네요~
김은영
엄마 아빠의 사랑과 영빈이를 아는 많은 이들의 사랑과 기도가 모여 더욱 건강하게 자라리라 믿어~^^
임희진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 응원 덕분에 건강하게 자라겠죠~
류지은
울희진이 고생많았구.멋진엄빠야.. 영빈아 건강하게 쑥쑥자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