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웃고 잘 우는 막내 라율이
“요새는 제법 커서 낯을 많이 가려요. 그래도 고맙죠. 탈 없이 쑥쑥 자라고 있으니까요. 잠투정이 심해서 잘 때 많이 찡찡대는데 그럴 때마다 인큐베이터에 있던 시기의 동영상을 봐요. 그때 결심했거든요. 내가 절대 너에게 화를 안 내리라. 건강하게 커주기만 한다면. 네가 울어 봤자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다짐하는 거죠.”
라임이, 라율이의 엄마 박윤옥 씨는 낯선 이들에 놀라 보채는 라율이를 능숙한 손놀림으로 어르며 활짝 웃는다. 라율이가 엄마 품에 안긴지 7개월이 되었다. 폐가 약해 인큐베이터 안에서 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쉬던 라율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 이제 몸을 뒤집기도 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까만 눈으로 세상을 배워가는 중이다.
28주차, 갑자기 찾아온 진통
알뜰하고 든든한 남편 배인면 씨와 세 살짜리 귀여운 딸 라임이. 주말에는 라임이를 친정어머니께 맡겨두고 결혼 전에 하던 메이크업 아티스트 일을 짬짬이 해가며 곧 일에 완전히 복귀할 수 있을 거라는 계획도 세워두었다.
“첫째 때는 임신성 당뇨도 있고 그랬는데 라율이 때는 별로 아픈 데도 없어서 이른둥이로 태어날 줄은 가늠하지도 못했어요. 초반에 피가 보여서 병원에 갔더니 유산 방지 주사만 맞으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주사 맞고 아무 일도 없어 안심했죠.”
라율이를 품은 지 28주째, 갑자기 배가 아파졌다. 그 전에도 배가 아픈 적이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활동량이 많아서 그렇다기에 이번에도 그런 거라 믿었다. 어차피 다음날이 정기 진료니 그때 가서 얘기하면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당장 종합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며 진단서를 써주었다. 진통인데 왜 몰랐느냐는 호통과 함께 아기가 숨을 안 쉬는 것 같다는 소리에 부랴부랴 종합병원으로 뛰어갔다. 담당 교수는 35주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했지만 라율이가 세상에 발을 디딘 건 32주차. 혼자 호흡을 할 수 없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다.
아름다운재단과의 만남
“당시 저희 집이 갑자기 어려워졌어요. 남편이 하던 일도 잘 풀리지 않았는데,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거든요. 당장 수술을 해야 했어요. 라율이가 퇴원하고 3일 후에 남편 수술 날이었으니까 정말 경황이 없었죠.”
항상 나쁜 일은 한 번에 일어나는 걸까. 화물 운송업을 하던 남편의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던 과적으로 벌금을 내자마자 세금을 줄이려는 회사 때문에 어마어마한 세금을 물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경남에서 서울로 화물을 싣고 오다 고속도로에서 차의 바퀴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결국, 차를 팔고 폐업 신고를 하기로 결정한 데다가 원래 통풍이 있어 무릎이 안 좋았던 남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수술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첫 임신에 당뇨가 있어 고위험 산모군에 속했던 윤옥 씨는 나라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본인 비급여 부분 중 일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절차도 복잡했다. 라임이 때와는 달리 라율이 때에는 임신성 당뇨가 없어서 결국 지원받을 수 있는 금액은 5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당장 라율이의 퇴원을 앞두고 남편의 수술비까지 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부부는 우연히 병원의 엘리베이터에 붙은 아름다운재단의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포스터를 본 남편은 우리랑 상관없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름다운재단에 전화를 했어요. 병원 안에 의료사회복지부서가 있으니 상담을 받아보라고 하시더군요. 당장 찾아가서 상담을 했죠. 다른 지원 프로그램을 찾아보았으나 막상 신청을 해보면 절차와 조건이 까다로운 경우가 많았어요. 게다가 대부분 먼저 정산을 하고 나중에 환급을 받게 되어 있는데 병원비를 지불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뭐 하러 지원을 받으려고 하겠어요. 그때는 정말 눈앞이 깜깜했어요. 이른둥이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고 관련 정보를 찾아보면 수술비만 몇 천만 원이라고 하고요. 겁만 먹었죠. 그런데 아름다운재단에서 도와주셔서 무사히 퇴원했어요. 아름다운재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아요. 그때 저희는 사금융 대출을 받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전세금을 빼고 고시원에 가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했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를 믿는 것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라율이. 이제 8킬로그램에 가깝게 몸무게도 늘었다. 다만 소화기능이 약해 먹은 걸 게워내는 경우가 잦고 청력이 좋지 않아 검사를 받아야 한다. 벌써 네 차례 검사를 받았지만, 아직 확진이 나지 않아 4월 마지막 검사를 앞두고 있다.
“아기들은 아주 작은 소리도 들어야 한대요. 그래야 언어 발달에 지장이 없다고요. 만약 마지막 검사에서 청력에 문제가 있다고 나오면 보청기를 사용해 교정해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인공와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해요. 검사 때마다 라율이를 금식 시켜야 하고 또 수면마취를 시켜야 해서 안쓰럽죠. 검사비며 진료비도 부담이고요. 그래도 제가 보면 라율이 귀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거든요. 잘 듣는 것 같아요. 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윤옥 씨는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연신 라율이와 눈을 맞춘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보다도 제일 먼저 믿어야 할 건 아이라는 게 윤옥 씨의 생각이다. 엄마의 신뢰가 전해져서일까. 라율이는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다.
항상 든든하게 아이들을 믿는 엄마 덕에 언니 라임이도 동생에게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엄마와 아빠를 이해한다. 아직 글을 읽지 못하면서도 언니 곁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동생에게 그림책 내용을 설명해 주기도 하고 언니 노릇을 하느라 라율이를 끌어안고 거실을 종종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한다. 그런 두 딸을 사랑으로 바라보는 엄마와 든든하게 지켜주는 아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라율이는 더 단단하게 자라고 있다.
“조금 특별하게 태어났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모든 아이는 다 다르니까요.”
엄마의 말을 알아듣는지 엄마의 따뜻한 품 안에서 라율이의 까만 눈이 더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엄마에 대한 믿음이 뽀얀 라율이의 얼굴에 조금씩 번진다.
글 이경희 l 사진 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