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은 여성장애인들이 사회활동과 일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인생 주기에 맞춘 보조기기를 지원합니다. 일률적으로 동일한 보조기기가 아닌, 지원자 개개인의 특성과 상황에 맞춘 보조기기를 지원함으로써 보조기기 사용 활용도를 높였습니다. 여성장애인들이 보다 나은 일상을 경험하며 삶의 선택지를 넓혀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2022년 최종 심사 과정에 참여해주신 심사위원 세 분의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전해드립니다. |
여성 장애인이기 때문에 지원해야 할 보조기기가 따로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름다운재단이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 LG생활건강과 함께 3년 동안 진행해 온 사업이 있습니다. ‘여성장애인 맞춤형 보조기기 지원사업’. 여성장애인이 처한 삶의 맥락을 고려하면서 장애유형에 맞는 보조기기를 지원하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순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상황. 이전까지 여성장애인들이 일상에서 수없이 겪어야 했던 일들인데요. 보조기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누군가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던 순간이 주도권을 갖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덕분에 이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자기 효능감을 느끼며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당사자들에게 이처럼 큰 의미가 있는 지원사업을 운영하는데는 심사에 참여한 위원들의 힘이 컸습니다. 한신대학교 재활상담학과 남세현 교수, 천안시 사회복지협의회 박혜경 이사,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 권성진 연구실장입니다. 세 사람은 2022년 지원사업의 최종 지원대상자 선정심사와 함께 3년 동안의 사업 성과를 돌아보기 위해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보조기기 연구자와 사업 설계자, 여기에 여성장애인 당사자까지. 이들의 입장은 달라도 지향점은 같습니다. 장애로 소외되는 이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같은 목표로 손발을 맞춰온 세 사람이 바라본 지원사업에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여러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 ‘여성장애인’에게 지원이 필요할까?
사업을 설계하고 실행해온 권성진 연구실장. 그는 한국에서 여성장애인의 현실이 여타 선진국과는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성인지 감수성이 발달한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같은 장애유형에서도 사회적으로 성별에 따른 차별이 있다는 건데요. 그렇기에 여성장애인에 대한 지원사업을 구상하고 싶어도 이에 선행하는 선진국의 사례를 찾기 어려웠다는 거죠.
“이 사업을 준비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어요. 한국의 여성장애인은 장애인으로서와 여성으로서의 차별을 동시에 겪는다는 거예요. 교육이나 경제적인 문제 등에서 한국의 다른 장애인보다 더 많은 차별을 경험하죠. 유럽 같은 선진국에서는 여성장애인의 인권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요. 장애인의 권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젠더 차별문제도 크지 않죠. 한국은 아직 아니예요.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지원사업은 그런 안타까움을 해결하는 단초가 되는 사업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출산과 육아, 사회경험 등 여러 환경에서 여성장애인 당사자로서 느끼는 부분이 있었어요. 사업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들은 말들은 곧 제 이야기이기도 했죠. 그런 점에서 전문가이기보다는 당사자의 관점으로 심사에 참여해왔어요. 내 입장에서 육아나 사회생활을 할 때 이런 보조기기가 있었다면 더 편하지 않았을까? 그런 것들에 주목하는 거죠.”
박혜경 이사는 여성장애인 당사자로서 사업의 대상자인 여성장애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성평등과 관련하여 비장애인 입장에서는 ‘가사의 역할이 꼭 여성에게 국한될 필요가 있는가’라는 문제제기가 있기도 한데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육아의 역할에서 배제되어 온 여성장애인에게 육아 참여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정에서부터 스스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고 그걸 수행함으로써 ‘보탬이 된다’는 성취의 경험, 박혜경 이사는 이 부분의 필요성을 당사자의 관점에서 놓치지 않고 지원사업을 설계하는 과정에 의견을 보태왔습니다.
“똑같은 장애유형을 두고 성별에 따라 상황을 보면 남성과 여성이 받는 차별이 달라요. 통계상 여성이 남성보다 교육수준과 노동현장에 투입되는 수치가 낮습니다. 남성 장애인에게는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교육을 시키고 전문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면, 여성장애인은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거나 식구들에게 밥하는 정도로 역할을 제한합니다. 우리 어머니 세대가 받은 차별이 오늘날 여성장애인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접목돼요.”
‘여성장애인’으로 지원사업의 대상을 구체화한 부분에 대해, 남세현 교수는 여성장애인을 둘러싼 사회인식의 한계를 짚었습니다. 사회가 여성이자 장애인인 구성원을 바라보는 겹겹의 시선, 여기에서 그는 장애인 당사자가 누려야 할 인권이 제한되는 상황에 주목합니다.
“공정한 역할분담도 중요하지만 어떤 여성들에게는 엄마로서 아이와 애착관계를 갖고 그 아이를 통해 육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감 혹은 보람을 느끼고 싶어할 수 있어요. 이런 부분이 장애라는 이유로 제약이 생기거나 아예 박탈당하는 상황이라면 이런 여성장애인들이 불편하지 않을 수 있게 보조기기를 지원하는 거죠.”
장애를 이유로 선택의 기회에서 애초에 제외되는 여성장애인들. 세 위원들은 지원사업의 필요성을 확신하면서 여성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이 어떤 부분인지 찾아나갔습니다.
‘여성장애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지원이란?
지금까지의 장애인 보조기기 지원사업은 사회활동이 많은 남성들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 왔습니다. 보조기기 제작이나 지원대상자를 결정하는 방식에서 여성장애인에 대한 틈이 생길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지원사업은 그 틈새에 주목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장애인의 삶을 지원해나갔는데요. 이런 관점을 사업에 반영하는 데는 심사위원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원사업 심사를 하다보면 지원 요청을 한 품목이 그리 거창한 게 아닌 경우가 있어요. 비장애인이 볼 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장애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거죠. 예를 들면 분유 타는 기계도 장애인용으로 만든게 아니지만 손기능이 불편한 여성장애인에게는 내가 혼자 할 수 없는 걸 해주는 획기적인 지원품목이 돼요. 저희는 이렇게 지원이 필요한 품목들을 더 많이 찾고 보다 적극적으로 보급하면서 다른 장애인들도 알고 활용하게 하는 것도 이 사업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혜경 이사는 여성장애인들을 위한 보조기기가 다른 기기들보다 더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단순한 기능의 물건도 휼륭한 보조기기가 될 수 있다고 짚었습니다. 전문기술을 얼마나 접목시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보통 사람들은 보조기기라 하면 의료 쪽 기기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꼭 의료기기에 해당하지 않아요. 여성장애인 입장에서는 아이가 울면 소리와 함께 켜지는 카메라인 베이비시터 같은 제품도 훌륭한 보조기기거든요. 해당 품목은 아이를 독립적으로 키우려고 아이방 바깥에 두고 아이의 반응을 확인하고 돌보기 위한 보조도구예요. 여성장애인의 경우 아이의 반응을 즉각 알아차리기 어려워 베이비시터 같은 기기도 그 특성에 맞게 더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어요.”
지원사업에서의 여러 시도들, 그 의의는?
사업이 갖는 의의 가운데 꼭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원의 당사자인 여성장애인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도록 목소리를 내고 사회활동을 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박혜경 이사는 사업에 지원하는 과정이 여성장애인에게 자기 권리에 대한 공적인 영역에서 목소리를 낼 기회임을 설명했습니다.
“공공기관에 가면 ‘휠체어 지원해드릴까요? ,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이런 식으로 질문한단 말이죠. 그런 점에서 장애인은 언제나 수혜를 받는 대상이 돼요. 반면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하는 사업은 지원사업 당사자가 자신에게 해당하는 특정 보조기기가 왜 필요한지 서술해야 하고, 서술한 서류를 심사받은 후 채택되는 과정을 거쳐요. 내가 쓴 문서가 채택됐을 때의 성취감도 얻겠지만 그 성과 후 실제로 보조기기를 쓰면서 삶의 질이 좋아진 거예요. 장애인 입장에서는 스스로 주도적으로 찾고 싶은 걸 찾는 사람, 내게 뭐가 필요한지 고민해보는 사람이 되는거죠. 그 과정 자체가 자기 개발이자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부여되는 과정이예요.”
여기에 남세현 교수는 기존 지원사업의 한계와 더불어, 본 지원사업 자체가 새롭게 해낸 사회적 역할에 주목합니다. 그전까지의 장애인 지원사업이 각기 다른 장애유형을 모두 ‘장애인’으로 묶어내는 획일적 지원이었다면, 이 지원사업은 각각의 장애유형을 개별적으로 보고 장애 당사자가 처한 상황까지 고려하는 사례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한국 보조기기 지원제도의 특성은 품목을 먼저 결정해 놓고 이 가운데 필요한 걸 지원하는 구조예요. 그 안에 선택할 수 있는 기기가 없으면 해당 사항이 없음을 안내하게 되는 시스템이거든요. 여성장애인이 아이를 낳아서 키워야 하는데 장애 때문에 아이를 안아주거나 아이와 함께 이동하는 것이 어려울 때, 이런 문제를 지금 제도에서는 어떤 품목으로도 정해놓은 게 없는 상황이예요. 제도를 설계한 사람 중에 정말 여성장애인, 아주 소수의 여성장애인이 가지는 필요를 절박하게 느껴본 사람이 없었겠구나. 이런 짐작이 드는 대목이죠. 그런 점에서 아름다운재단이 하고 있는 이 사업은 한국의 기존 지원 시스템을 바꿔서 도전하는 거예요. 당신의 장애에 특별한 상황이 있고 그 상황에서 뭔가 제한당하고 있는데 그게 여성장애인이기 때문에 더 이중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죠. 이런 식으로 더 새로운 대안을 많이 찾아내는 거거든요. 한국의 보조기기 지원제도가 갖고 있는 근본 문제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모델을 제시해준다고 봐요.“
지원사업의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
보조기기를 지원받은 여성장애인들은 자신의 바뀐 일상만큼 가정을 나아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조금씩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가고 있습니다. 이를 체감한 세 명의 위원들 입장에서 이 사업에 대해 갖는 애정이 남다른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요. 박혜경 이사는 이 지원사업이 좀 더 오래 지속되길, 지원받는 당사자가 이 사업을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널리 알리길 바라며 그간의 소회를 밝혔습니다.
“큰 돈이던 적은 돈이던 누군가의 삶을 변회시키도록 가치있게 쓰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무엇보다 이 사업을 통해 가정 안에서 여성장애인의 삶이 유지되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정이 무너지면 여성장애인이 사회로 나갈 수조차 없잖아요. 거의 대부분의 지원사업은 지원에 선정된 사람이 취업을 얼마나 유지했는지 등 눈에 보이는 성과를 중시하죠. 육아나 가정생활 같은 부분은 결과치가 나오기 쉽지 않아요. 그런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3년 동안 진행하는 건 사업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부담일 수 있지만 감사한 부분이기도 해요. 장애인들은 우리만의 느낌과 감수성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이 사업 덕분에 내 삶이 좋아졌어’라는 말이 본인 입으로 나오면 좋겠어요. 사실 모든 장애인 지원사업이 처음에는 당사자 중심인 듯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 사업을 계획했던 비장애인 중심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요. 이 사업은 여성장애인 당사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운영되고 있어요. 그 부분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으면 해요.“
남세현 교수는 이 지원사업의 의미가 ‘연결을 만드는 일’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던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채고 각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과정. 그러면서 차별받아온 당사자가 자신의 권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다는 겁니다.
“사업 결과를 보면서 이런 지원사업이 하나의 연대를 만드는 일일 수 있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비장애인이어서, 혹은 남성장애인이어서 몰랐던 부분에 대해 여성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내주고, 그런 경험을 당사자들이 서로 듣고 공감하면서 지지하는 과정이었거든요. 여성과 장애인이라는 이중적 차별과 배제를 온몸으로 받아내셨던 분들이 보조기기 지원을 계기로 우리 또한 똑같이 존중받고 이 사회에서 귀중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는 거죠. 여성장애인들이 작게 시작하는 이 유대감과 연대가 결국은 여성장애인의 권리를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고 제도나 정책까지 끌고 가도록 하나의 목소리로 만드는 데 첫 시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예요.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한 이 사업이 그런 기대감을 느끼게 하는 계기였어요.“
권성진 실장은 해당 사업이 법과 제도에 적용되는 단계까지 확장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사업의 대상자를 찾아내고 그 사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지원에 대한 근거를 만들어 가면서 언젠가는 여성장애인의 권리가 당연해지는 세상이 되길 꿈꿉니다.
“이 사업을 제도화하는 게 목표입니다. 사업 과정에서 여성장애인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결과치를 확보했고 이를 통해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던 사업의 과정들이 있어요. 이를 기반으로 정책 제안을 위한 충분한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봐요. 정책화가 한 번에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저희가 해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더 커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겠죠. 무엇보다 이번 사업이 비슷한 고민을 하는 다른 나라들에게 모범 사례가 될 거고요.”
장애 당사자의 목소리와 목소리에 공감하는 여러 노력이 모여 새로운 성과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지원사업에는 이런 마음과 노력이 연결돼 있습니다. 이 마음과 노력이 여성장애인들이 하고 싶은 일을 제약없이 행복하게 해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라 믿습니다.
글/이상미
사진/김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