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에는 2000년 설립 이후 가장 처음 조성된 1호 기금인 [김군자할머니기금]을 시작으로 2013년 현재 200여개의 기금이 조성되었습니다. 모든 기금은 하나 하나마다 수많은 기부자의 사연과 나눔이 담겨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금들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재단 웹사이트가 블로그 형식으로 개편되면서 예전 게시판에 소개되어 있던 기금 소식과 사연들이 잊혀지는 것이 아쉬워 [아름다운기금 이야기]라는 시리즈로 기금에 담겨 있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아름다운기금 이야기]에는 아름다운재단 초기의 기금 조성과 확대에 참여해주신 많은 분들의 이야기들을 차례로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김군자 할머니 기금 전달식 가져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돈

세상은 그녀를 빼앗았지만 그녀는 세상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2000년 8월 30일, 일본군위안부였던 김군자 할머니, 아름다운재단에 전 재산 5천만원을 기탁하였다.
할머니의 수중에 남은 돈은 장례비용으로 남겨둔 5백여만 원뿐…
흥건히 땀에 젖어 계시면서도 선풍기 바람에 조차 온 몸의 뼈와 살이 시리시다는 김군자 할머니를 모시고 나눈 한 시간 여 동안의 이야기들…

“할머니 왜 결혼은 안하셨어요?”

기금전달식과 기자회견을 마치고 못다한 이야기들을 묻는 자리에서 한기자가 툭 물었습니다.

“삶이….. 기구해서, 너무 기구해서 그런 생각도 못해봤어.”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할머니는 17세 되던 해 수양아버지의 심부름을 가다가 일본군에게 끌려가셨답니다. 그 길로 중국 훈춘에가 해방되던 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한 것입니다. 다시 돌아간 고향 땅, 허나 이미 고향도 그도 서로를 쓸어안기엔 너무 많은 사건과 기억들이 고랑을 치고 있었습니다. 2년여를 고향에서 서성이다 서울로 올라와 술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술집 일도 막일도 장사도 하며 혼자 몸으로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 그렇게 혼자 견디며 살아온 시간동안 마음속에 들끓던 날선 기억들이 어느 날 매스컴에서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말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92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기화로 밝혀지기 시작한 그 참혹했던 전쟁과 일본군대 만행, 고백과 증언을 통해 드러나는 할머니의 지나온 삶은 가히 상상키조차 끔찍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혼자 살아온, 견뎌온 세월들이 할머니의 입술을 무겁게 했던가 봅니다.

이미 극심한 관절염으로 혼자 삶을 견디는 일이 불가능해진 96년에 이르러서야 정선군청을 통해 비로소 신고를 하셨습니다. 그 후 정선군청의 도움으로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마련한 집에서 함께 지내시다가 98년 3월, 오랜 혼자의 삶을 끝내며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다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같은 상처를 지닌, 그 상처를 숨기지 않고 투쟁으로 치환해 가시는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할머니 뭐가 제일 힘드셨어요?”
또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외로운 거, 혼자 살았으니까. 그게 제일 힘든 거지 뭐”

“너무 사는 게 힘들어서 절에도 많이 다녔어, 좀 깨달아 볼려구, 왜 이렇게 힘든지, 왜 나만 힘든지… 깨달아 볼려구…”

이해로는 감내하지 못 할 만큼의 격랑과 고통이 할머니를 스치고 지나갈 때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깨달음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는 절을 전전하시다가 지금은 카톨릭에 귀의하셨다고 합니다.

가슴속에 가득한 날선 기억을 덜어 줄 사람 하나 없었던 그 오랜 세월, 그 기억들이 속에서 마음을 저미며 몸마저 상하게 했었던가봅니다. 할머니는 선풍기 바람만 불어도 온 살들이 시려 견디지를 못하십니다. 조계사에서 아름다운재단에 이르는 그 짧은 길에도 온 몸을 적실만큼 땀이 흥건해 지셨습니다.

“할머니 왜 특별히 고아들을 위해 기부할 생각을 하셨어요?”

“내가 고아였거든, 배운거라곤 야학 8개월이 전부야, 어려서 부모를 잃고 못 배운 탓에 삶이 그렇게 힘들었던 것만 같아서…. 조금 배웠더라면 그렇게 힘들게 살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이 배울 기회만이라도 갖도록 돕고 싶어. 근데 너무 작은 돈이라 부끄럽고 미안해”

“5천만원을 모으기가 쉬운 일은 아니셨을 텐데요…어떻게 모으셨어요?”

“내가 정선에서 장사할 때 모은 돈두 조금 있구, 정부 지원금 받은 돈들을 차곡차곡 안 쓰고 모아온 돈들이지 뭐”

혹 민간기금은 아니었냐는 문의가 있었다는 이야기에 혜진스님이 대답을 보태셨습니다.

“할머니들이 그 아프고 고달픈 삶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공식사죄를 피하고 돈으로 무마해 보려 보낸 민간기금의 유혹을 어떻게 거절해 오셨는지 아신다면 그런 질문은 안할겁니다. 이 돈은 한푼의 민간기금도 섞여있지 않은 순수한 돈입니다. 십년도 채 안되는 기간동안 15만원에서 시작한 정부보조금으로 살아오시면서 모으신 돈들이예요. 98년에 민간기금을 막아보려 지급된 한국 정부의 보조금이었던 삼천만원도 고스란히 들어있구요.”

“할머니 이제 이 5천만원을 빼면 남은 재산이 얼마나 되세요?”

“남은 재산…. 한 5백만원쯤 되나”

“그건 어떻게 쓰시려구요?”

“그건 갈 때 써야지…. 장례비용으로….”

할머니가 말씀을 하실수록 우리는 점점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기금전달식도 감사장 전달도 혜진스님이나 할머니의 인사도 모두 마치고 난 후 재단에서는 기부문화 확산을 위한 ‘씨앗의 나무’에 할머니의 마음을 적은 잎새 하나를 달려고 준비해 두어던 나눔의 잎새와 펜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팬을 드신 채 가만히 멈추어 계셨습니다. 잠시 후 어렵게 입술을 여셨습니다.

“나는 글을 쓸 줄 모르는데…”

할머니가 그 나뭇잎새에 어떤 글을 쓰시는지 포착하려고 들이대고 있던 모든 카메라들이 그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때 곁에 계시던 혜진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 이름 석자는 쓰실 줄 알잖아요. 이름만 쓰세요. 그걸로도 충분해요.”

‘김’………’.군’………’자’

천천히 또박 또박 할머니는 이름 석자를 써 내려가셨습니다. 어떤 명문보다 웅숭 깊은 세 글자였습니다.
그 속에 담긴 것이 말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이었겠지요.
할머니는 그 이름 석자가 적힌 나눔의 잎새를 씨앗의 나무에 거시고 흰 봉투에 고이 담아오신 오천만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건네셨습니다. 어떻게 할머님 귀한 뜻을 받을까 고민하던 재단에서는 할머님 연세만큼 장미꽃을 안겨드렸습니다. 허나 75송이의 장미도 상처를 거름삼아 피워낸 사람꽃 한송이의 아름다움을 넘어설 수 가 없었습니다.

  
유산이나 유언이란 단어는 한 번도 쓰신 일이 없건만 이 돈이 할머니의 유산이란 것도 이 돈을 받을 이들에게 하시는 당부가 유언이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확인하고 싶은 물음은 아니었겠지만 또 다시 누군가의 질문이 할머니를 툭 치고 지나갔습니다.

“지금도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앞으로는 어떻게 사시려구요?”

“지금도 아프지, 한 달에 한약값만 50만원이 들어. 그런데도 별 차도가 없어. 그러니까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서…. 무언가 맑은 정신으로 정리를 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너무 요란 떨 것 없어. 너무 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 뿐이니까”

몇 년전 ‘대지의 눈물’이라는 정신대 할머니 돕기 콘서트에서 한 가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이제 할머니를 할머니라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 부르시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줍시다.”

차를 타고 출발하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다가 속으로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어머니”라고…

이 기금이 더욱 크고 풍성해져 돈이 꼭 필요한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그 날, 할머니가 오늘처럼 나들이를 나오셔서 아이들 어깨를 쓸어 안아주시는 풍경을 , 부모 없이 살아온 시린 삶을 지닌 그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품과 손이 어머니가 되어주는 따스한 풍경 하나 꿈꾸어보았습니다.

 

기금을 전달받은 아름다운재단에서는 ….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경제적인 곤란은 물론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고통마저 안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일본의 전쟁 책임 불이행에 반대하여 진정한 사죄와 진상 규명, 배상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본의 전쟁 책임 회피 수단인 민간기금 모금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할머니들의 고통과 어려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탁한 김 할머니의 기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돈”입니다. 특히 일찍이 부모를 잃은 슬픔과 어려움을 경험한 김 할머니가 의지할 데 없는 고아를 돕고자 하는 뜻은 단순히 연말연시나 재해시 일시적인 대규모 모금행사를 통해 불우이웃을 돕는 기업체나 부유층의 기부와 구별되는 진정한 “나눔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재단은 김 할머니의 뜻에 따라 기탁한 기금을 고아들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별도 관리하되 기금을 더욱 의미 있게 하기 위해 김 할머니의 뜻에 함께 하는 이들을 모아 기금을 확대, 지속적으로 운영할 것입니다.
 

[2000년 8월 30일]

 

댓글 정책보기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