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시나리오 스폰서 지원사업을 통해 1923 한일재일시민연대는 간토학살사건을 기억하고 계승해온 일본의 지역별 시민단체를 만나 인터뷰하고 ‘죽은 자의 인권을 지키는 사람들’ 영상을 제작했습니다.

기억을 이어가는 이들은 그 기억의 역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우연으로 다가와 필연으로 사로잡은 나약한 이들을 통해 역사는 세상에 메시지를 던진다.
순례여행은 이렇게 기억을 계승하는 이들을 찾는다.
사로잡힌 자들에게 복있으라!

“빈민과 장애인, 스스로를 보호할 여력이 없는 이들을 남의 손을 빌려 제거하는 수단으로, 좋아진 지표는 조작됐을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잖은 사람들이 정책에 환호하고 미국은 일 년 중 단 하루, 공포와 비명에 휩싸인다.”

영화 속 이야기이지만 국가권력의 구조적 폭력성은 국민을 갈라치기하여 ‘애국심의 허울’로 제노사이드를 정당화 한다. 우리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방관자가 될 수도 있다. ㅡ 요코아미초공원에서 량대륭선생이 던진 메시지

한신대학생들과 함께 한 간토학살현장투어

일본에 도착한 첫째날, 요코아미초공원으로 향했다. 첫날의 기억을 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첫째 날 비행기를 내리자 마자 향한 곳은 요코아미쵸공원 도쿄도부흥당이었다. 도쿄공습과 간토대지진으로 인해 희생당한 자국민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일본을 “피해자”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이, 당국이 행해왔던 반인륜적인 전범 행위들을 회피하기 위한 것임을 설명을 통해 알게 됐다. 그리고 마당한켠에 관동대지진시 학살당한 조선인을 기리는 비가 있었다. 이 일을 기억하고 사실을 규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수십년이 지난 지금 변한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간토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일본 사회의 자성과 한국 사회의 노력이 이뤄지길 바란다.” 김연우

간토를 걷는 둘째날. 오전에는 아라가와에서 ‘유골을 발굴하여 추도하는 모임’의 기억계승 활동과 추도비를 세우고 지켜온 봉선화회의 니시자키 마사오 이사의 증언을 만났다.

오후에는 지바로 가서 계엄령 발포를 위한 조선인 음해를 후나바시 송신망을 통해 전국으로 보냄으로써 ‘不逞鮮人’의 헛소문은 사실화되고, 계엄군대와 경찰과 자경단은 조선인 처분을 정당화한다.지바 마고메령원에는 학살 후 1주기인 1924년 추도식에 세워진 추도비와 1947년 재일조선인연맹이 세운 큰 비가 있다.재일동포들이 세운 비 뒷면에는 일본 군부의 만행을 꾸짖고 살아남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겠는가의 의지를 다지는 명문의 글이 새겨져 있다.간토 학살 추도순례에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다.

지바의 히라카타 선생님은 김종수 대표를 보고 “처음 만났을 때 참 젊었었는데~”라고 하셨다.그 때 김종수 대표는 40대 중반이었고, 선생님들은 지금의 대표님 나이쯤 되셨을 것인데…그러니 이제는 각 현장의 리더들 모두 연로하시니 이 일을 이어갈 젊은 활동가들이 나타나야 한다..마침 고향 지바를 여행오신 정숙자목사님과 만났다. 매주 화요일 줌 학살학습회에서 만나지만, 현지 추도여행은 처음이다.히라카타 선생님과 정숙사목사님 두 분이 다정스레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아라가와 봉선화회는 젊은 활동가들과 세대교체가 잘 이뤄지고 있는 듯 하다.이번 100주기에는 젊은이들이 기획을 맡을 것이기에 내년에는 한국대표라해도 발언을 못할 수도 있다고 했던 니시자키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참 다행한 일이다.

엿장수 조선 청년 구학영

간토학살ㆍ추도순례여행 사흘째. 
사이타마에서 만난 엿장수 조선 청년 구학영의 죽음을 마주한 학생들은 엿장수 구학영을 쓴 김종수 대표를 만나러 온 사이타마고등학교 학생들과, 활동가, 기자들이다. 구학영묘소에 한국인이 다녀가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해서 깜짝 놀랐다는 주지스님은 그런가 하고 물으니 ‘엿장수 구학영’ 책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 학생들과 올바른 기억과 계승, 콘텐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다.

나흘째에도 마지막날인 다섯째 날에도 추도여행은 계속 되었고, 저녁에는 영상을 어떻게 만들지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눴다,다섯째날 대학생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스탭 몇은 남아서 추가 인터뷰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남았다. “잘 도착했습니다”라는 한국 도착 문자를 받고서야 마음을 내려둔다.“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사실이 많았습니다. 특히 탐방 이전에 간토대학살에 대해 글로만 접했을 때와는 다르게 실제 학살이 발생한 장소에 방문하여 어떻게 학살이 발생하였는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더 크게 와닿았습니다. 무고했던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해당하였는지 듣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무거운 마음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 모두가 이를 알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번 간토다크투어를 통해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선생님들의 설명을 들으며 놀랐던 것은 우리나라에도 간토대학살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다수일 텐데 일본에서 이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감사한 마음과 동시에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에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4박 5일 동안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4박 5일이라는 시간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진희(鄭珍熙)”

“사람들만이 역사를 기억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조선인을 품은 흙도 기억하고요,헤엄쳐서라도 고향에 가고 싶어했던 조선인들이 찢기고 잘린 채 던져진 저 바다도 기억할 것이며, 칼로 베어 흩뿌려진 조선인들의 피를 머금은 들풀들도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간토학살100주기를 기억하고, 또 그 기억을 계승하려고 추도식을 준비하였고, 10월 말로 간토학살100주기추도사업을 마무리하는 평가회도 마쳤다. 100년을 지나며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에서는 그동안 고마운 분들이 보내주신 자료,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촬영한 추도비 사진, 추도예술품 등 많은 분들의 마음을 역사관에 잘 담아낼 것이다.

글, 사진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댓글 정책보기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