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날씨를 뽐내던 토요일 오후, 평소에는 여유롭기만 하던 아름다운재단 사무실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새내기 기부자를 위한 ‘처음자리마음자리’ 행사 덕분이다.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한 아버지, 광주광역시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온 사회복지사, 인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 세종시 공무원, 강원도 춘천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30대 부부, 눈빛만 봐도 통하는 오래된 연인…. 이날 한자리에 모인 새내기 기부자들은 나이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모두 달랐지만 각자 마음에 품어온 나눔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서로를 공감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나눴다.
사연이 터져 나올 때마다 한마디라도 놓칠 새라 눈과 귀를 쫑긋 모았고, 초등학생 아이의 똑 부러진 외침에 연신 웃음보를 터트리는가 하면, 마음이 아픈 아들의 사연을 조곤조곤 풀어가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모두가 뜨거운 공감을 토해냈다. 새내기 기부자들은 이날 처음 서로를 마주했지만, 나눔을 향한 마음만큼은 서로 꼭 닮아있었다.
나눔의 대물림, 아버지와 아들의 특별한 부전자전
“저에게 나눔이란 ‘우리의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마을사람들과 나누다 보면 결국에는 큰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회의실 가득 울려 퍼졌다. 주인공은 초등학교 2학년 현승윤 군. 새내기 기부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름다운재단을 처음 방문한 승윤 군은 이날 행사의 마스코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른들이 주저하는 사이 맨 먼저 일어나 ‘나에게 나눔이란 OO이다’ 빈칸 채우기 발표를 한데 이어, 재단 사업 설명 후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도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용감하게 질문을 던졌다.
처음 보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이 낯설고 어려울 법도 하건만, 승윤 군의 행동은 전혀 거침이 없다. 알고 보니 나이는 어려도 나눔 경력이 꽤나 화려하다.
“유치원 때부터 기부 저금통에 용돈을 모았어요. 얼마 전에는 조계사에서 열린 모금학교 행사에 참여해서 재개발로 쫓겨나는 장애인 형들을 도와주기도 했고요. 오늘도 제가 먼저 따라온다고 한 거예요. 아름다운재단은 처음 와봤는데 정말 멋져요. 제 꿈이 프로그래머가 돼서 새로운 것을 많이 만드는 건데, 훌륭한 프로그래머가 돼서 더 많이 기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승윤 군의 남다른 나눔 행보 뒤에는 아버지 현관명 기부자가 자리하고 있다. 기부 자체가 낯설던 2000년대 초부터 지난 10년여 동안 풀뿌리 단체들을 지속적으로 후원해왔다. 최근에는 ‘돈을 내고’ 기부에 관한 전문적인 공부를 받기도 했다. ‘부전자전’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 이유다.
“언젠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어요.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끄는 것은 대부분 NGO 활동에 있고, 돈만 버는 곳에서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고요. 그렇다면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NGO 활동에 힘을 보태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풀뿌리 단체에 지원을 해왔고 그들을 지원하는 아름다운재단에도 기부를 하기로 한 거예요. 열악한 상황에서 활동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앞으로 여력이 된다면 더 많은 힘을 보태고 싶어요.”
친구 따라 기부한다? 나눔의 가치를 재발견하다!
나혜현 씨는 광주광역시에 있는 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복지 현장을 누비며 누구보다 나눔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던 그녀는 최근까지 여러 곳에 기부금을 전달해왔다. 하지만 10년을 꽉 채운 지난해 모든 기부를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자신이 생각했던 기부의 의미와 달리, 그저 매달 통장에서 일정액이 빠져나간다는 느낌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허탈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10년 동안 기부를 해왔지만 그것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냈는지 스스로 반문하게 됐고, 고민 끝에 정리하기로 했어요. 하지만 나눔의 절박함은 늘 현장에서 느끼고 있기 때문에 더 나은 방법을 계속 찾고 있었죠. 그러다 얼결에 친구 따라 모임에 오게 됐는데, 여기 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재단 사업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기부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어요. 내려가면 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더 꼼꼼하게 살펴보려고요. 다시 기부를 시작한다면 아름다운재단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진희 기부자는 직장 동료였던 나혜현 씨와 명순빈 씨 두 명과 모임을 찾았다. 혼자는 쑥스러우니 마음 맞는 친구와 동행하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친구의 기부 결심은 그래서 더 큰 즐거움이다.
“기부를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단지 사회복지 분야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좋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함께 오자고 한 거예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름다운재단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놓고 일상에 찌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들어가서 힐링을 하거든요. 특히 기부문화연구소에 올라오는 글들이나 배분사업 관련 자료를 챙겨보며 힘을 많이 얻고 있어요. 말은 안 했지만 친구들도 오늘 저와 비슷한 에너지를 받았을 거예요. 함께 오길 너무 잘한 것 같아요.”
나눔, 스스로를 보듬고 서로를 치유하는 생명의 힘
이날 모임에는 혼자 아름다운재단을 찾은 새내기 기부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 중 검은색 두건을 쓰고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조금의 쑥스러움도 없이 누가 봐도 당당한 모습으로 모든 순서를 차분히 이어가던 그녀에게 그런 사연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었나 보다. 김신연 기부자가 입을 열었을 때,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작은 한숨과 깊은 끄덕임을 동시에 내뱉고 있었다.
“제 아들이 좀 아파요. 그래서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했어요.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데 혼자 집에서 컴퓨터를 하거나 텔레비전 보는 게 전부에요. 다행히 2주일 전부터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어요. 한부모 가정이어서 이런저런 지원이 많은 편인데 아이는 어느 것도 배우거나 해보려고 한 적이 없어요. 사실 우리 아들은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최근 일 년 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저한테 문득문득 하더라고요.
그래서 기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아이가 기부를 통해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너보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세상은 지금 네가 바라보는 것과 많은 것이 달라,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어서요. 당장은 아이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기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3초 정도 침묵이 흘렀고, 곧이어 정적을 깨듯 뜨거운 응원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얼굴 표정과 맞부딪히는 손에서 그녀를 향한 감사와 위로의 마음이 흐르고 있었다. 기부는 결코 돈의 여유가 아니라는 것을, 단순히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 아니라 나눔을 통해 나 자신과 주변 사람과 나아가 세상을 치유하는 일이 기부의 진짜 의미임을 그녀는 자신의 삶을 통해 말해주고 있었다.
나눔의 씨앗을 심는다, 더 큰 행복의 열매를 만난다!
처음자리마음자리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나눔의 씨앗 심기’다. 기부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답답한 건물 밖을 벗어나 가을의 멋을 잔뜩 머금은 바람을 즐긴 후 알록달록 화분에 쌀알보다 작은 씨앗을 조심스레 옮겨 심었다. 각자 마음에 품은 나눔의 이야기들이 앞으로 더 큰 행복의 열매를 맺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아서 말이다.
씨앗은 지금 당장 보기엔 보잘 것 없다. 흙속에 제 몸을 감추고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물을 충분히 머금고 따뜻한 햇볕을 쬐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파란 싹을 틔운다. 무럭무럭 자라 가늘고 긴 이파리를 활짝 펼치고, 그 사이로 작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기부자들이 뿌린 나눔의 씨앗이 지금 당장은 작고 여린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행복과 기회와 평화의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이다.
9월 12일 열린 ‘처음자리마음자리’ 모임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가 오갔다. 누군가에게는 기부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시간이 됐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스스로를 보듬은 치유의 시간이 됐을 것이고, 어쩌면 누군가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했을지 모른다. 앞으로 수개월 후 다시 열릴 처음자리마음자리 모임에서는 또 어떤 나눔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될까.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글. 권지희 | 사진. 김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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