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밤의 기록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명명한 열두 달의 명칭은 볼 때마다 흥미롭다.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을 주제로 이름을 짓기에, 같은 달을 부르는 명칭이 부족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11월을 두고 ‘강물이 어는 달’이라 이르는 하다차족이 있고 ‘기러기가 날아가는 달’이라 부르는 키오와족이 있다. 그런가하면 아라파호족의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다. 스산한 계절에 온기를 불어넣는듯해 자꾸만 입안에서 굴려보게 되는 이름이다. 이동상담소 유레카를 따라 다니던 늦은 11월 밤, 저 이름을 떠올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그 기다림의 징표로 환히 불을 밝힌 캠핑카가 있어,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밤이었다.
S# 1. PM 06:30 마천사거리
금요일 오후 여섯시 반. 평범한 직장인들이라면 퇴근길이거나 ‘불금’의 약속장소로 이동할 그 시각, 한희규 팀장은 유레카를 몰고 마천사거리로 향한다. 찾아가는 이동상담 캠핑카, 유레카는 ‘Your dream Raising Car’란 속뜻을 품은 이름. 캠핑카가 멈춰 선 곳은 강가도, 숲속도 아닌 신축건물 공사장 앞이다. 아이들이 지나칠 만한 길목이라 종종 이동상담소를 차리는 곳이지만, 11월의 밤거리는 한산하다. 영하로 뚝 떨어진 날씨 때문일까. 오늘따라 아이들은 통 보이지 않고, 유레카와 함께하는 상담 자원봉사자도 한 명 뿐이다.
S# 2. PM 07:10 그림자조차 숨는 밤
자원봉사자에게 유레카를 맡기고, 한 팀장은 직접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이 주로 몰려다니는 골목과 공원을 둘러봤으나, 아무도 없다. 그림자조차 몸을 사리는, 차고 시린 밤. 그래도 기다림을 접을 순 없다. 더 사랑하는 이에게, 기다림은 매너다.
S# 3. PM 08:00 문정공원
문정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원이라 차광막을 치는 것이 허용되어, 유레카를 보다 눈에 띄게 차릴 수 있다는 것이 이 구역의 장점이다. 간소하게나마 지붕이 생기니, 그 아래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로 꾸린 상담소가 조금은 아늑하게 느껴진다. 테이블 아래 작은 난로는 언 발을 녹일 만큼의 온기를 제공한다. 한줌의 온기와 차광막을 바람막이 삼아, 유레카는 다시 불을 밝힌다.
S# 4. PM 08:10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한 팀장이 아이들과 만난 건, 문정공원에 자리를 튼 지 불과 십분 만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주로 오는 편인데, 오늘 처음 만난 아이들이에요. 고민거리 있으면 뭐든 이야기해도 좋다니, 일단 저쪽에 화장실부터 다녀오겠대요. 그냥 가려고 그러나보다 했는데, 다시 오네요.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
S# 5. PM 08:30 소년의 마음
남자 셋이 나누는 대화가 궁금해 귀기울여보니, 여자 이야기다.
“좀 차가운 스타일에요. 제가 원래 좋아하는 타입이 그래요. 마음은 착하대요. 걔랑 친한 제 친구들이 그랬어요.”
소년의 이야기 속엔 요즘 자꾸 신경 쓰인다는, ‘차가운 스타일’의 여자아이가 9할이다.
S# 6. PM 08:40 유레카의 고정 게스트
“쌤, 핫팩 주세요, 핫팩!”
유레카의 단골손님, 중2 여학생들이 등장했다. 작년부터 오기 시작한 아이들로, 처음엔 무리 중 한 친구가 한 달 동안 혼자 찾아오더니, 한 명 두 명 친구들을 데려와 지금은 캠핑카 고정 게스트로 자리 잡았다. 수다, 보드게임, 학교 축제무대를 겨냥한 댄스연습까지, 캠핑카는 아이들에게 유용한 아지트다.
“쌤, 얘 또 학교 안 왔어요. 너 우리한테 치킨 사야 해, 학교 빠졌으니까. 1인 1닭!”
“그럼 나도 1닭 하나?”
아이들은 자주 결석하는 친구를 걱정하는 목소리마저 경쾌하다. 자원봉사자 김민수 씨도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친다. 경계를 허물기 위한, 아이들과의 대화법이다.
유독 말이 없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캠핑카에 놀러온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핸드폰만 들여다보다 돌아가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한다는 애니메이션을 구해 보고나서야 민수 씨는 아이와 말문을 트는 데 성공했다. 듣고 관찰하고, 상대방의 관심사를 통해 접점을 갖고자 노력한다. 말을 거는 건 그 다음이다. 모든 관계엔 신중한 호흡이 필요한 까닭이다.
S# 7. PM 09:30 한밤의 보드게임
밖의 온도는 영하로 떨어졌건만, 캠핑카 안의 아이들은 시원한 음료를 찾는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 상대방이 가진 숫자를 맞춰야 하는 다빈치코드 게임은 만만치 않은 기억력과 추리력을 요한다. 유레카의 고정 게스트들은 오늘 이 보드게임을 위해 한 시간 남짓 야외에서 추위를 견뎠다. 게임, 친구들, 간식, 한밤의 이야기…. 어떤 이유로든, 아이들은 지금 이곳에 있다.
S# 8. PM 10:17 또 다른 기다림
쌤, 오늘 캠핑카 오나욤!?!?
응, 갑니다
한희규 팀장이 보여준 카톡 메시지 속 주인공이 나타났다. 기다란 패딩으로 온몸을 감싼 소년은, 길 건너편에서부터 한 팀장을 향해 손을 흔든다. 기다림은 한 팀장만의 몫이 아니었다.
S# 9. PM 11:15 불빛과 웃음이 흐르는 창
패딩 소년과 한 팀장까지 합세해, 캠핑카는 이미 만석이다. 창문 밖으로 흘러넘친 따뜻한 불빛과 웃음소리 때문일까. 멀리서 바라본 캠핑카의 작은 창문은 훈훈한 가족 드라마를 방영 중인 TV 모니터 같다.
S# 10. PM 11:38 마치 스태프인 듯 척척
유레카 고정 게스트들이 돌아가고, 소년과 한 팀장, 자원봉사자 민수 씨만 남았다. 소년은 시키지 않아도 척척 캠핑카 정리를 돕는다. 스태프처럼 자연스런 움직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S# 11 PM 11:43 놀이터에서 헤어지는 아이들처럼
“또 봐!”
놀이터에서 헤어지는 아이들처럼 웃으며 손 흔들었지만, 혼자 돌아선 뒷모습엔 웃음기가 쏙 빠진다. 이별은 매일, 매순간 발생하고, 우리는 이에 충분히 익숙해진 듯싶지만, 거짓말을 모르는 뒷모습은 쓸쓸한 마음 한구석을 들키고 만다.
S# 12. PM 11:49 한 기다림이 다른 기다림에게
금요일의 심야상담은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 될 터. 유레카의 다음 행선지는 거여동이다. 한 기다림이 다른 기다림에게로 향하는 길. 기다림과 그리움은 한 몸이라, 유레카의 뒷모습에 이런 시 한 편 겹쳐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_ 정희성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글 고우정ㅣ사진 현일수
*본 촬영은 아름다운재단 <사각지대 청소년 단체지원사업>을 통해 거리청소년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는 한빛청소년대안센터 캠핑카 이동상담소의 2016년 11월 25일 이동상담 현장 동행취재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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