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변화의 시나리오 지원사업’은 우리 사회의 대안을 만들고,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공익활동,  특히 ‘시민참여와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공익활동’ 지원을 핵심가치로 합니다. 변화의 시나리오 프로젝트 B 지원사업은 시민사회단체 및 풀뿌리 단체의 시범적이고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함으로써 공익활동의 다양성 확대를 꾀하고자 합니다.

아름다운재단 ‘변화의 시나리오 프로젝트 B 지원사업’에 참여하는 ‘대구참여연대’는 6월항쟁 3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하며 11월 29일 ‘대구, 6월의 함성과 미래의 목소리’ 출판기념회를 준비했습니다. 대구참여연대의 보도자료에서 일부를 인용하여 책에 대한 소개를 전하겠습니다^^

1987.6 책 표지

대구는 어떤 곳인가. 그리고 이 책은 어떻게 나왔는가?

이 책의 ‘책을 내며’에서도 밝혔듯이 “현재 대구의 이미지는” “군사독재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수구꼴통, 고담 대구”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통용되고 있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인식의 통용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구의 정치적 선택은 한국 사회가 반 발짝이라도 나아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 없듯이 이러한 대구의 선택에도 역사적 이유가 분명히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책의 참여자이자 계명대학교 역사학과에 재직 중인 이윤갑 교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간명하게 녹아 있다.

4월혁명 당시 통일운동이나 노동운동 중에서 교원노조운동 같은 경우는 대구가 시발점이었죠. 7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는 여전히 서울과 버금갈 정도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고 학생운동도 굉장히 선진적으로 발달해 있었죠.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게 있었어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전국 대학생들이 연합해 시위를 계획한 사건인데 박정희 정권 때 그 배후로 조작된 게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이었죠. 그 사건에서 9명이 사형을 당했는데 그중에 대구 출신이 많아요. 이런 역사에서도 드러나지만 이 지역이 70년대까지는 민주화운동을 굉장히 선도하는 진보적인 지역이었어요. (23~24쪽)

대구는 사실 해방정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봉기인 1946년 10월항쟁의 도시이며, 좌파민족주의자들 중 대구 출신이 많아서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기도 한 도시다. 1987년 6월항쟁 때에도 여느 도시 못지않게 치열하게 민주화 투쟁을 치른 곳이며, 이 책은 바로 그 기억을 담은 책이다. 또 이 책은 지역에서 벌어진 6월항쟁에 대한 기록 중 아마 최초일 것이다. 변변한 기록이 없어서 6월항쟁 당시 투쟁에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을 찾아 그 기억을 채록한 책이기도 하다.

대구, 보수의 중심지이기 전에 항쟁의 중심지

탄핵 위기에 몰렸을 때 박근혜는 대구 서문시장을 찾았으며, 자유한국당 대표 유세 때에도 홍준표는 대구 서문시장을 찾았다. 그만큼 대구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한 대구의 바닥 정서가 보수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1980년 광주에 대해서도 “요즘도 서문시장 같은 곳 가면…..”  “북한 특수부대가 내려와 선동해서 한국 군인하고 싸웠다” 말하고 6월항쟁 때는 일부 “서문시장 상인들이 식칼 들고 나왔지만…” 역으로 인근에 계명대학교가 있어서 6월항쟁 때 대학생들의 주요 집결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문시장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이기도 하며, 3·1만세운동 때는 “3월 8일에 대구제일교회의 이만집 목사 등 기독교인과 인근의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고보 학생들까지 총 800여 명이 서문시장에 집결, 시위를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전통들은 1987년 6월항쟁 때 다시 되살아나며, 이 책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것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대구에서는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사회단체,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라고 있었습니다. 민통련에서 1월부터 전국적으로는 보조를 맞춰 2월 7일, 3월 3일 가두집회를 했었고 경북대에서는 학원민주화 투쟁을 했는데, 연일 5천 명에서 1만 5천 명씩 모여 본관을 점거하는 등 데모를 했었죠. 5·18광주민주화항쟁 기념집회 등을 통해서 계속 운동 및 집회를 해왔었습니다.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6월항쟁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전국 동시다발 투쟁이었다는 점입니다. 서울 중심으로만 일어났다면 모든 경찰 병력이 몰려 결국에는 진압됐을 것이나 전국적인 투쟁이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경찰 병력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결국 6·29선언으로 이어진 겁니다.(103쪽)

유인물 같은 경우는 A4 용지 반 장 정도 크기로 만들어서 한 사람당 300장 정도 가져요. 네 개 대학교에서 100명 정도 모으죠. 사람을 모으고 나면 먼저 버스노선도를 그리고, 동성로하고 한일극장 앞 중앙로를 지날 때 정도로 시간을 맞춰서 몇 번 버스, 몇 번 버스, 이런 걸 다 지정해줘요. 거기는 워낙 교통이 복잡하니까 맞물려서 막 몇 대씩 서거든요. 정해준 시간과 버스에 타고 가다가 그 지점에서 버스가 서는 순간 창문을 열고 위에 올려놓고 내려버리는 거죠. 그럼 차가 가면서 쫙~ 날리는 거예요. 그러면 만 장 정도가 거리에 뿌려지고 학생들은 안 잡히고 그랬었죠. (166쪽)

6월항쟁 이전부터 대구도 역시 민주화에 대한 열기로 서서히 예열되고 있었음은 이런저런 증언에 의해 드러난다. 물론 그 중심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격이 그렇듯이 대구에 있는 대학생들이 있었다. 다행히 계명대학교가 대구 도심지에 있어서 학생들의 시위는 곧잘 번지곤 했다. 또 6월항쟁을 전후로 해서 벌어진 대학교, 고등학교 학내민주화 사례도 증언되고 있어 그 가치가 예사롭지 않다. 또 1986년에 한미은행 옥상 점거농성을 하다 검거된 학생들의 부모들이 결성한 민가협 이전의 ‘구속자가족협의회’에 대한 짧은 이야기라든가, 1985년 대구에서 조직된 ‘지방사회연구소’가 각 지역의 대학 교수들의 모임을 추동했고, 그 모임들의 집합체가 민교협이 되었다는 사실(史實)들도 증언되고 있다.

1987년 6월항쟁을 2017년 청년이 묻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2017년의 청년이 1987년 6월항쟁 세대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는 구성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6월항쟁의 주체들이 전면에 나선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년들의 목소리와 호흡이 들려오게 구성되었다. 6월항쟁의 주체들에게 묻는 청년들의 질문에는 6월항쟁을 다시금 리부팅하려는 고민이 숨어 있다.

Q. 30년 전에 선배님들께서는 목숨을 걸고 학생운동을 하셨는데, 이번 촛불집회만 봐도 30년 전에 비하면 대학생들의 참여율이 확실히 눈에 띄게 적습니다. 사회문제를 대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실망스럽진 않으신지요.

이 : 패턴은 분명히 달라요. 지금 학생들이 화염병 들고 나오겠습니까? 시대가 분명히 변했고 지금 학생들은 다 우리 세대가 키워낸 사람들 아니에요? 또 우리가 그렇게 교육을 시켰고. 부모한테 교육받은 것보다 자기들끼리 사회 속에서 배운 게 더 많을 텐데 서로 소통하다 보면 바뀌는 부분이 있겠죠. 이제는 과거 패턴으로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되죠. 많은 통로들이 있잖아요. 유튜브나 팟캐스트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접하고 있을 거예요. 과연 그걸 조직해낼 것인가 말 것인가는 그들의 몫이거든요. 재밌는 게 참 많아요. 지금은 폭이 얼마나 넓어요. 그중에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메뉴판도 다양하고. 그걸 기준에 맞춘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죠. (90~91쪽)

또 반년에 걸친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느낀 청년들의 소감을 별도의 챕터로 구성했으며, 그들이 같은 세대의 청년의 의견을 물은 내용도 가감없이 전하도록 했다. 그 방향이 무엇이 되었든 1987년 6월항쟁에 대한 해석은 다음 세대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6월민주항쟁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되새기는 이번 활동이 많은 분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활동에 임했고, 그래서인지 작업을 할 때마다 큰 이유 없이 가슴이 뛰고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바라는 마음이 아닌 진심으로 6월민주항쟁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활동에 제가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힘이 나고 열심히 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변할수록 당시에는 아무리 심각했던 일이라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선 잊히게 됩니다. 저희의 활동이 사람들이 6월민주항쟁에 관심을 가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최소한 잊히지는 않길 바랍니다.(381쪽)

책 속 밑줄 긋기

두렵지. 그때 심정이 안 두려운 사람이 없지. 최루탄이 하도 날아오니께. 그래도 딴에 우리가 민가협인데…. 보통 사람들은 그 앞에 한 번도 못 갈 거야. 근데 민가협 엄마들은 자식이 고생하는데 우린 죽으면 어떻냐 캄서 나서는 거지. 엄마들 마음은 똑같아. “우리 이만큼 살았는데 죽음 어떻노, 우리가 안 하면 할 사람 누가 있노.” 카면서, 그래 마음이 딱딱 뭉치데. 그래서 대구백화점이다 뭐다 어디라도 모인다 카면 항상 가고 활동 많이 했어. 고마 모임이 완전 직업이라. 서울도 자주 가고 서울 가는 거 보려도 가고, 얘기하려고도 가고 가담하려고도 가고, 많이 댕겼어. 그땐 겁이 없었어. 자식을 교도소에 넣어놓곤 엄마 마음이 겁나는 게 없어. 계명대 앞에서 경찰이 한 번 그 카대. “집에 갔을 때는 순한 양이더만 와 이래 사자로 변했는교?”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 하는교? 당신도 죄 없는 아들 형무소 드가 봐요. 나보다 더할 걸.” 그카니까 자기도 “안 그러겠습니까…” 그러더라고. 데모 중에도 대화는 해봤다.
― ‘울 아들이 뭘 잘못하드노?’ (45쪽)

광주에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학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유언비어였던 세상이었거든요. 진실은 아무리 덮으려 해도 송곳처럼 튀어나오잖아요? 어떻게 감추겠어요. 먼저 접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대학 생활 내내 그걸 접해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동시대를 살았던 저희 세대 중에도. 우연한 기회에 먼저 접한 사람이 있을 테고, 그러면 ‘왜’ 하는 물음이 당연히 나오겠죠. 그렇기 때문에 86세대들 대부분이 학생운동을 접하고 투사로 변하는 과정의 근간에는 80년 5월이 깔려 있다고 보는 겁니다.
― ‘‘광주’와 6월항쟁’ (56쪽)

출판기념회 소식 – http://civilpower3.ivyro.net/?p=15564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슬픔이 있었고 아주 더디지만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지요. 대구참여연대의 책 소식을 전하다보니 지금 제가 사는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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