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희망찾기(청소년자발적여행활동지원사업)를 통해 자발적 여행을 다녀온 십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어른은 빼고 갈게요!>가 지난 2018년 6월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이 탄생 되기까지 고우정 작가의 수 많은 취재 인터뷰와 밤을 지새우는 올빼미 원고 작업이 있었는데요. 고우정 작가는 여행책을 쓰다가 지금은 여행자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남해의 작은 마을 동천리에 자리잡고 있는 몽도 게스트하우스에서 보내 온 고우정 작가의 작업 후기를 들려드립니다.

작년 10월 이맘때, <어른은 빼고 갈게요!>에 수록될 세 번째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2017년 여름부터 시작된 ‘길 위의 희망찾기(이하 길희망)’ 단행본 작업은 원고를 쭉쭉 뽑아내지 못하는 작가, 죄 많은 본인 때문에 진도가 꽉 막힌 상태였다. 10개 팀 인터뷰를 모두 마친 것은 9월. 7월부터 한 달에 3~4팀 씩 인터뷰를 했으니, 계획대로라면 반 이상의 초고를 넘겼어야 할 시점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아이들을 만나 짧게는 2박3일, 길게는 16박18일의 지난 여정을 되짚어내는 작업은 인터뷰부터 녹록치 않았다. 인터뷰라는 낯선 형식을 즐기는 아이도 있었으나 어색해서 입을 닫는 아이도 있었다. 토막 나고 더러 유실된 기억 속에 팩트 체크는 필수. 생생한 에피소드를 끄집어내야 했고, 그 무수한 일화 속에 반짝이는 감정과 분위기를 잡아내야 했다.

게스트하우스 몽도에 비치 된 책

게스트하우스 몽도에 비치 된 <어른은 빼고 갈게요!>

작년 가을과 겨울, 책상 지킴이 혹은 책상 지박령이 되어 오사카와 백두산과 스리랑카와 제주, 부산을 넘나들었다.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원고에 좌절하고 굴을 파다가도, 한 팀의 여행기를 마칠 때면 어김없이 ‘마감 조증’ 상태가 되어, “멋진 여행이었어!” 하고 축배를 들었다. 덕분에 지난 가을과 겨울은 친구도 만나지 못한 채(마감의 책상을 떠나지 못하느라), 가장 술을 많이 마신 시간으로 기억된다.

올해 6월 초, 나고 자란 고향 서울을 떠나 남해로 귀촌했다. 남해로 이사 하던 날, 꽉꽉 채운 5톤 트럭을 먼저 보내고 빈 집을 둘러보다 눈물을 왈칵 쏟았다. 6년을 산 부암동 집엔 정이 담뿍 들어있었다. 서울을 떠나는 것보다 부암동을 떠나는 게 서운해, 좀처럼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종로구를 벗어날 쯤이었던가. 유배라도 가는 양 차 안에서 쉼 없이 훌쩍이던 중, 출판사 편집장님의 문자를 받았다. 단행본 표지 작업을 마쳤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전해진 마지막 마감 독촉은 책날개에 실릴 저자 프로필이었다. 고작 프로필 몇 줄도 마감이라고, 단어와 글줄에 집중하다보니 눈물이 쑥 들어갔던 게 서울과의 이별, 혹은 단행본 마감의 마지막 기억이다. 삶의 터전을 옮기며 직업을 바꿨다. 오랜 시간 밥벌이 수단이었으며 긍지이자 감옥이었던 매문(賣文) 대신 내가 취한 새 직업은 숙박업이다.

책 날개 사진

<어른은 빼고 갈게요!> 책 날개의 작가 프로필

남해로 귀촌했지만 바다 한 귀퉁이 보이지 않는 마을에 들어앉아 남편과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기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다’는 버젓한 표현보다 내가 즐기는 건 ‘방을 친다’는 표현이다. 18년 원고 마감 인생 중 타인에게 가장 많이 듣고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 중 하나가, “(걱정스럽게) 마감 다 쳤어?”, “(매우 자랑스럽게) 마감 다 쳤어!”다. 그 때문일까. ‘방을 친다’는 말이 입에 착 붙는다. 염소를 치는 것도, 원고를 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지금 방을 친다. 4개월 남짓 방을 치며 24개월 유아부터 7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행자들을 만났다. 물론 게하의 특성상 20대 젊은이가 다수이긴 하나, 가족여행객의 발걸음도 제법 이어진다.

부모님을 따라 온 10대 청소년들을 만날 때면 나도 모르게 ‘길희망’ 인터뷰 하던 버릇이 튀어나온다. “오늘은 어디 갔다 왔어요?”, “이번 여행에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건 뭐죠?” 물론, 대부분 답이 없다. 익숙한 침묵이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였다면 신나게 떠들고 깔깔 웃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꼭 1년 전에 만났다.

<어른은 빼고 갈게요!> 에 수록된 ‘길희망’ 10개 팀 중 아이들의 여행 현장에 투입돼 ‘관찰기록’이라 할 밀착 취재를 진행한 팀은 두 팀이다. ‘벼랑 끝 기억 여행’ 팀과의 덕유산 산행, ‘길 위에서 음악 찾기’ 팀과의 부산 시티투어가 그것. 예기치 않은 사고를 대비해 교사 혹은 트래블러스 맵에서 파견된 여행 멘토가 함께 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이 주체가 된 여행에 아무런 개입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무거운 짐을 주렁주렁 짊어진 채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는 과자를 찾아 깡통시장을 서너 바퀴 쯤 돌고 또 돌 때, 지척에 둔 명소를 포기하고 길을 헤맬 때, 참견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닫고 바라본 아이들은 어른의 시선으론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여정도 뚝심있게 소화해내고 그 안에서 재미와 웃음 포인트를 찾아냈다. 오사카&교토 여행을 다녀온 ‘덕후하라’ 팀 인터뷰 중 인솔 교사와 한 청소년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본 기억이 있다. 이는 책에도 수록한 내용인데, 다음과 같다.

이동할 때마다 지하철역에서 최소 30분 이상 헤매면서 시간이 허비되는 게 괜찮았어? 답답했다거나, ‘미리 정보를 더 찾아보고 올걸.’ 하고 후회했다거나… (인솔교사) 음, 저는 괜찮았어요. 계획표대로 딱딱 움직였다면 쉴 틈이 전혀 없었을 거예요. 표 끊느라, 길 찾느라, 관련 정보를 찾아보느라 멈춰 있던 순간들이 다 쉬는 시간이었어요. 헤매느라 쉬기도 했던 거지요. 안 그랬으면 그 더운 날씨에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신주원)
책을 든 작가

책의 산파 역할을 했던 고우정 작가

소지품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가장 믿음직한 친구에게 라스트 키퍼 역할을 맡겼으나 정작 라스트 키퍼가 분실 사건의 주역이 된다거나(‘지구인 아이들의 오사카&고베 집중 탐구’), 보딩패스를 잃어버리고는 탑승시간이 다 되도록 공항을 뒤지고 다닌다거나(‘덕후하라’), 팀 회비가 든 지갑을 찾아 부산 남포동 일대를 샅샅이 훑은(‘길 위에서 음악 찾기’) 사연은 ‘길희망’ 여정을 취재하며 가장 눈여겨 본 대목이다. 좌충우돌 여행 에피소드의 광맥이라 할 이 숱한 분실담엔 공통점이 있다. ‘친구의 실수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약속과 이행이다. 길 위의 피로가 쌓인 채 마음이 어긋나 삐걱거리는 순간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친구의 실수를 보듬고 함께 해결했다. 일본 여행의 버킷리스트로 불꽃놀이를 꼽아놓고는 걷기 힘들다고 불꽃놀이 대신 오락실을 선택하는 것(‘덕후하라’)도 아이들이고,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지역을 찾아 슬픔의 손을 잡고 우는 것(‘우리 베프 하자’)도 아이들이었다.

길잡이 역할을 맡은 친구가 내릴 역을 지나칠까봐 버스에서 잠들지 못하는 걸 보고, 다음 날엔 자신이 버스에서 졸음을 참는 마음(‘제주와 친구에 시나브로 물들다’)도, 모닥불이 꺼지면 먼저 잠든 친구들이 추울까봐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불을 지키는 마음(‘정글의 아이들’)도 참 예뻤다. 일곱 명이 함께 여행을 떠난다면 일곱 빛깔의 로망이 한 배를 타는 것임을 알고, 내 꿈만큼 중요한 친구의 꿈을 존중해주는 속 깊은 헤아림이 있었다(‘Dream job으러 가드래여’). ‘혼자 이기는 것 말고, 누군가와 같이 이겨 내고 싶어서(‘정글의 아이들’)’ 이 여행을 선택했던 아이들이다.

생각보다 더 발랄하고 사려 깊은 십대의 자발적 여행기를 취재하며 내가 느낀 재미와 감동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었다. 그 고민의 깊이만큼 충실한 기록이 되었다고 자신할 순 없으나, 한편의 여행기를 마칠 때마다 해당 여행지로 떠나고 싶어 들썩이던 내 마음이 전해진다면 솔직한 기록은 되었노라 자부할 수 있겠다.  ‘여행은 어디를 가는지 보다 누구와 함께 가는지가 더 중요한 거 같다’던 ‘벼랑 끝 기억 여행’ 팀 승헌의 말이 생각난다. ‘길희망’ 여정을 통해 아이들 스스로 터득한 깨알 같은 여행 팁은 이 여정의 관찰자였던 내게도 꽤 유용한 지침이 됐다.

해변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

고우정 글작가(우측 두 번째)는 글을 쓰고, 부군 현일수 사진작가(우측 첫 번째)는 사진을 찍었다.

경험은 취향을 낳고 취향은 때로 견고한 벽을 치기도 한다는 걸, 여행자의 집을 운영하며 종종 느낀다. 비교적 경험이 적은 어린 여행자들일수록 미세한 자극에도 오감과 마음을 연다. 사소한 풍경에도 감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흥이 나서, 현지인(5개월 차 귀촌인이지만, 손님 입장에선 여행지의 현지인이다)이 제공할 수 있는 정보를 하나라도 더 보태고 싶어 입이 바쁘다. ‘생애 첫 혼자 여행’, ‘첫 남해 여행’, ‘인생 첫 게하’라며 눈을 반짝이는 어린 여행자들을 볼 때마다 1년 전 ‘길희망’ 친구들이 떠오른다. 생애 첫 무인도, 첫 비행기, 첫 마라탕, 첫 버스킹…. 길은 또 다른 길을 부추긴다. 뜨겁고 설레는, 길 위의 그 모든 첫 기억을 길잡이 삼아 십대의 파란만장 자발적 여행이 지속되길 바란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아침에 들은 첫 노래를 흥얼거리네 나는, 모든, 첫 기척의, 볼모

(김혜수, ‘모든 첫 번째가 나를’ 중에서)

 

글 고우정ㅣ사진 현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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