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 씨(가명 22세)의 인생은 주거안정 지원사업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답답한 고시원을 벗어나 주방이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지내게 되었고,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정직원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 고민을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만났다. “막막하고 힘들 때 주거안정 지원사업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어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이 보이지 않는 듯 했던 독립생활

어렸을 때 친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친척집을 오가다 13살 때부터 아버지의 친구 분이 키워주셨는데 안타깝게도 길러주신 부모님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죠. 만 18세가 되자마자 독립을 결심했어요. 모아 놓은 돈은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무작정 부딪혀 보는 수밖에요.”

가정위탁보호아동인 선재씨는 디딤씨앗통장이나 자립정착금의 존재를 몰랐다. 무일푼 상태로 집을 나와 작은 고시원에 짐을 풀었다. 구직구인 사이트를 통해 백화점 의류판매를 시작으로 치킨집, 고깃집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꾸렸다. 한 달을 벌어 고시원 방세와 생활비를 충당하는 식이었다.

보증금을 모아서 답답한 고시원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빚 때문에 뜻하지 않게 대출을 받았는데 그게 보이스피싱이었어요. 다른 곳에서 돈을 다시 빌렸고, 이자가 눈덩이처럼 커지더니 가압류까지 들어오더라고요. 혼자 감당하기에 벅찬 시간들이었어요.”

혼자 걸어가기 벅찬 시간들

혼자 걸어가기 벅찬 시간들

주거안정 지원사업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다

힘들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선재씨는 돈이 생기는 대로 빚을 갚았고 특별채무감면으로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평균 30만원씩 나가는 고시원 월세가 큰 부담이었다. 2017년 그의 사정을 딱히 여긴 지인이 주거안정 지원사업을 소개했다. 서류통과 후 면접기회가 주어졌지만 업무시간을 조율하지 못해 참가할 수 없었다. 선재씨는 2018년 새로운 마음으로 주거안정 지원사업의 문을 두드렸다. 결과는 지원대상자 선정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제게도 통하더라고요. 주거안정 지원사업을 통해 간절히 원했던 나만의 보금자리를 갖게 되었어요. 싱크대, 화장실이 있는 원룸이죠. 방을 구할 때 아동자립지원단에 이것저것 많이 묻고 귀찮게 했는데 늘 친절하게 알려주셨어요.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했는데 의지할 곳이 생기니 너무 든든하더라고요.

지지할 수 있는 대상이 생기자 선재씨는 용기를 냈다.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고 집이 있는 인천 서구에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이왕이면 오래 일할 수 있고, 주5일 근무로 주말에 쉴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구직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주방용품 제조업체가 그의 새로운 직장이 되었다.

지원사업을 통해 지원대상자가 얻은 쾌적한 주거지 사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준 주거안정 지원사업

냄비나 프라이팬을 만드는 일을 하는데 작업장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예전에 악덕 매니저를 만나 고생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근무 환경이 특별하게 느껴져요. 평일에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쉬는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 더 좋고요. 얼마 전엔 정직원이 됐어요. 주거안정 지원사업에 선정되고 나서 좋은 일만 생기는 거 같아요.”

선재씨에겐 욕심이 생겼다. 더 높은 직급까지 올라가 보는 것이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사업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는 순수한 선의가 존재한다는 것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든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한 가지 변화가 생겼어요. 주거안정 지원사업을 통해 LH 전세주택으로 이사하게 되었거든요. 불과 1년 동안 제 삶이 너무 많이 변해 얼떨떨할 정도에요. 오래 살 수 있는 집이 생겼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죠? 아동자립지원단에서 모니터링 오셨을 때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요. 이제 다 잘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요. 평범한 말이지만 제겐 큰 위로와 의지가 되었어요. 그 말처럼 된 것 같아 정말 행복해요.”

글ㅣ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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