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 ‘허진이’입니다. 보육원 퇴소 이후, 저는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잘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제가 받았던 진심이 담긴 말과 따뜻한 관심을 저와 같은 친구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허진이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보호종료 당사자인 청년들과 함께 아동양육시설 아동들을 대상으로 자립 강연을 진행하는 프로젝트인데요. 본 프로젝트를 통해 강연 당사자들도 보육원에서의 삶과 현재의 나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제 삶과 관점을 담은 에세이를 전해드리려 해요. 평범한, 보통의 청춘들의 삶이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지금 시작합니다. |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데서 비롯된 마음
내가 살았던 보육원은 20명의 아이들이 짜인 규칙대로 생활하는 곳이었다. 그 안에서 나의 하루 일과는 단조롭고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기분까지 단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어떤 날은 편안하고 어떤 날은 지루했으며 또 어떤 날은 화가 나고 속상했다.
선생님은 우리 기분을 살피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늘 같은 일상에 마음 상태도 늘 같은 줄 알았던 걸까? 선생님에게 평소와 다른 기분을 내비칠 때면 “진이가 오늘따라 이상하네.”라며 가볍게 넘기는 반응이 돌아왔다. 보육원 안에는 내 기분을 살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상상을 줄곧 했다. 아이들의 기분을 세심히 살피고 질문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 말이다.
과거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을 채우면서 멤버들과 첫 번째 보육원 자립 강연을 위한 발걸음을 했다. 상상만 했던 좋은 선생님이 될 기회가 바로 오늘이 아닐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머릿속의 선생님과 실제 강연에서 드러날 나의 모습에 얼마큼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른이 된 지금 그 정도의 괴리감은 마주해도 괜찮다. 아무렴! 괜찮은 어른이 되었으니까.
사실 나에게서 상상 속 선생님이 실현된 것은 멤버들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였다. 멤버들에게 나의 역할은 기획자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이들이 갖고 있는 목표와 기대를 실현시키고, 대부분 사회초년생인 멤버들에게 생활의 노하우도 알려주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매번 내가 상상한 선생님의 모습과 일치시키고자 에너지를 쓰는 순간이 많았다.
“오늘 기분이 어때요?”
강연에서 사례발표를 맡게 된 멤버에게 건넨 질문이다. 사례발표는 자신의 삶 전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이다. 보육원 입소 전부터 퇴소 이후까지의 이야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 자신’이 되어야 했기에 큰 용기와 준비가 필요했다.
“너무 떨려요. 괜히 사례발표 하겠다고 했나 봐요. 준비한 걸 다 못하면 어쩌죠?” 옆에 있던 또 다른 멤버는 “후배들을 빨리 보고 싶어요. 알려주고 싶은 것이 많은데 드디어 그 기회가 왔네요.” 라고 답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 멤버는 “어? 다들 떨려요? 난 아무렇지 않은데…ㅎㅎ”라며 첫 강연을 앞두고 긴장하는 멤버들을 멋쩍게 했다.
나는 멤버들에게 말했다.“괜찮아요. 지금 기분을 잘 기억해둬요. 앞으로 하게 될 매 강연마다 변화될 여러분의 기분은 성장의 표시가 될 거에요.”
긴장과 설렘 사이에서 웃고, 떠드는 동안 첫 교육장소가 있는 전주역에 도착했다. 오늘 첫 강연을 하게 될 아동양육시설(보육원)은 전주역에서 택시를 타고 15분 정도 더 들어가야 했다. 길게 늘어선 승강장 줄에 섰다. 줄이 꽤 길었던 탓에 멤버들과 옹기종기 모여 근황과 안부를 다시금 주고받았다. 대화 끝에 나는 또 다시 “오늘 첫 강연에 왔는데 기분이 어때요?” 라고 멤버들에게 질문했다. 정말 궁금했는지, 아님 택시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을 채우고자 나온 습관적 질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나의 질문에 서울역에서 같이 출발하지 못했던 또 다른 멤버가 대답했다.
“뭐 그냥 떨리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도 같아요!” 이로써 모든 멤버들의 오늘 기분을 다 듣고 나니 안심이 됐다.
누군가의 기분을 묻는 내 행동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상대의 기분을 알기 전엔 어떤 질문도 영혼 없는 대화일 뿐이고, 상대의 기분을 알고서야 모든 대화에 영혼이 담긴다고 느낀다. 상대도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신의 기분이 어떤지 잘 알고, 그것이 대화를 하는 상대에게도 잘 전달되었다면, 이후 대화들은 좀 더 생기로워지고 진솔해진다. 그러면 비로소 나는 해야 할 역할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느낌도 든다. 긴장한 친구에겐 긴장을 풀 수 있도록 따뜻한 차와 대화를 건네 줄 수 있고, 재미있을 것 같은 기대에 가득 차 있는 멤버에겐 그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적절한 역할을 제시 해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평소 단순한 성향의 나로서는 이런저런 것들을 살피고 신경써야 하는 기획자의 역할이 성향에 맞지 않다고 투덜대면서도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한다. 기획자로서 고단함은 뒤로 묻어두고, 멤버들과 후배들을 향한 관심과 응원의 에너지를 더 꺼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무겁지만 기분 좋은 발견을 한 채 우리는 교육 장소에 들어섰다. 강연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보육원 아이들을 마주한 채 우린 질문한다.
여러분, 오늘 기분이 어떠신가요?
글. 허진이 캠페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