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은 공익활동을 하고자 하는 시민모임, 풀뿌리단체, 시민사회단체를 지원합니다. 특히 성패를 넘어 시범적이고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함으로써 공익활동의 다양성 확대를 꾀합니다. ‘2020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에서 어떤 활동들이 진행되는지 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는 1994년 최초의 여성×성소수자 모임 끼리끼리로부터 출발한 인권단체로서 다양한 연대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2020년을 도약의 해로 정하고 상담소 내 작은 도서관 사포의 서재를 통해 회원뿐 아니라 비회원인 여성성소수자 여러분을 만나고자 <2020 사포의 서재>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5월부터 격월로 우리의 삶이 담긴 예술작품을 찾아 감상하고 나누며 존재를 확인하는 ‘낭독의 밤’과 ‘영상의 밤’을, 7월부터 다양한 문학 장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함께 책을 펴내는 ‘오토픽션 클래스’를, 펴낸 책을 토대로 모든 행사를 마무리하며 축하하는 ‘북 콘서트’를 기획했습니다.

낭독의 밤

“책 읽기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다.” -정희진-

낭독의 밤 모임 포스터 이미지와 진행 된 모임 현장 이미지 두 장

2020년 5월 23일(토) 저녁 7시 30분 신촌 모처에서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낭독의 밤이 열렸습니다. 선정된 첫 작품은 황정은 작가의 소설 「디디의 우산 –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였습니다. 우리 존재의 목소리를 내는 시작으로 아이러니한 제목이지만 그야말로 말할 필요 없이 끄덕이게 하는, 모두가 공유했던 시대와 사건 속에 철저히 배제되었던 사실이 명확한 문장으로 재현되어 눈에 비치고 귓가와 마음을 울렸습니다.

두 번째 낭독회는 7월 25일(토) 저녁 7시 첫 낭독회가 있던 같은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선정 작품은 권여선 작가의 소설 「아직 멀었다는 말 – 희박한 마음」으로 30여 년간 함께했던 연인을 잃고 홀로 된 노인 레즈비언의 이야기였습니다. 소모임 ‘시작은 책읽기’에서도 한 차례 낭독했던 이 작품을 통해 사회에서 연인과 가족으로 정의되지 않음으로 인한 갈등, 두려움, 경험 등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영상의 밤

“우리를 부르는, 우리에게 말을 거는 영화로 세상에 말을 걸다.”

영상의 밤 포스터 이미지와 모임 현장 사진 2장. 어두운 방에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영상을 관람하고 있다.

첫 번째 영상의 밤은 2020년 6월 6일 오후 6시 낭독회가 열렸던 장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영상회의 첫날을 기념하여 두 편의 영상, 다그마 슐츠의 다큐멘터리 <오드리 로드 – 베를린 시절, 1984년에서 1992년까지 Audre Lorde – The Berlin Years 1984 to 1992, 2012>와 다이 시지에의 영화 <식물학자의 딸 The Chinese Botanists Daughters, 2006>을 준비했습니다. 첫 상영작인 <오드리 로드 – 베를린 시절>은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통해 상담소와 인연이 깊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작가 오드리 로드가 미국-독일-베를린을 오가며 아프리카계-독일인들의 정체성을 찾아 성장하도록 세 지역을 잇는 다양한 세대의 흑인-여성 커뮤니티 형성에 기여하고, 이 여성들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는 글쓰기를 독려하는 등의 같은 여성 성소수자 간의 다름을 이해하도록 활동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어진 영화 <식물학자의 딸>은 세계적인 동시에 아시아에서 더욱 폭압적인 동성애 혐오와 이에 맞선 두 여성의 사랑과 저항을 시대 배경으로 잘 그려낸 작품이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우리의 존재 찾기’ 주제로 모인 관람객 모두에게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을지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차이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 각 사람의 고유한 삶의 배경과 성품의 다른 면들을 인정하면서 연대의 바탕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나의 상처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타인의 상처로 인해 내가 상처받지 않으면서 함께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두 번째 영상의 밤은 8월 8일(토) 저녁 7시 상담소 서재 공간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상영작은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 Frances Ha, 2012>입니다. 첫 상영회 때의 다소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한결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 선정했는데요. 감상 뒤에는 이 영화를 과연 퀴어영화로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부터 우리가 원하는 [주거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지, 집이라는 장소의 의미, 함께하고 싶은 대상, 사랑과 우정으로 나눠 정의할 수 없는 관계란 무엇인지, 영화에 관한 사사로운 정보의 나눔까지 흥미로운 질문으로 각자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영상의 밤은 11월 7일(토) 오후 3시 시민공간 나루 지하 1층 교육장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상영작은 여성영상집단 움의 후원으로 이영 감독의 <이반 검열, 2005>, <Out:이반 검열 두 번째 이야기, 2007>를 연속상영했습니다. ‘이반 검열’은 2000년대 중반 학교에서 성소수자인 학우를 고발 및 색출하던 실태를 가리키는 말로, 작품 속 주인공은 실제 당사자로서 직접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학교생활 등의 고민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가장 신뢰하고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아우팅의 위험과 압박에 시달리는 상황에 공감하며 지금으로부터 15-13년 전 주인공들의 현재의 삶은 어떨지, 정체성에 확신을 갖는 건 어떤 것인지 등에 관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오토픽션 클래스

아직 “깨지지 않은 침묵이 많다.” “강요된 평화가 아닌 정직한 불화를 위한” -홍승은

오토픽션 쓰기 특강 1,2,3차에 대한 각 포스터 이미지. 1차는 '성정체성을 중심으로' 2차는 '서사화의 방법을 중심으로' 3차는 '글쓰기 전략을 중심으로'이 큰 주제로 적혀있다.

오토픽션 클래스는 <2020 사포의 서재> 프로젝트의 중심축이자 각 프로그램을 통해 성찰한 우리 각자를 위해 우리가 직접 컨텐츠를 만들어내기 위한 글쓰기 워크숍입니다. 3회에 걸친 전문가의 특강으로 글의 방향과 목적을 잡고 주간 합평 모임을 통해 완성한 작품을 문집으로 출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오토픽션 클래스가 진행되는 현장 사진 2장. 네모난 큰 책상에 참가자들이 둘러앉아 있다.

2020년 7월 4일(토) 오후 3시 합정 모처의 넓은 공간에서 오토픽션 프로그램의 첫날이자 1차 특강이 열렸습니다. 상담소 회원이자 무지개책갈피 활동가이신 보배님께서 <성 정체성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강의해주셨는데요. 다양한 문학작품의 예시와 강사분의 진솔한 경험을 담은 강연이었습니다. 시간 내내 차분하고 집중하는 분위기가 이어졌고 글쓰기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쓰기 자체를 용기내어 시도할 수 있는 독려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당일 6명의 참가자가 필진으로 신청하셨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자신은 정체성에 대해 자연스러워 글쓰기 주제로 삼을 만큼의 중요성에 공감하기 어렵다고 하신 분도 계셨는데 역시 필진이 되시기도 했습니다.

2차 특강은 7월 11일(토) 오후 3시 같은 장소에서 <서사화의 방법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활발한 집필 활동가이자 가장 많은 기대를 모은 작가 홍승은님의 강연으로 이어졌습니다. 방법론 강의는 쉬이 지루할 수 있음에도 다른 생각에 틈을 줄 수 없었습니다. 두 시간여 동안 강사분이 직접 참가자에게 질문하시고 각자의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글쓰기를 고찰하고 직접 쓰며 풀어내는 등 준비한 시간을 꽉 채우는, 꾸준한 성찰을 하고 그 성찰대로 타인과 나눌 수 있는 방식으로 잘 풀어주신 강의였습니다. 보통 5시간을 강의하신다니 시간이 모자랐던 것 같기도 하네요.

마지막 3차 특강은 7월 18일(토) 오후 3시 역시 같은 장소에서 <글쓰기 전략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책과 글쓰기에 관한 가장 다방면의 경험을 가지신 회원 마라사드님의 강연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내부로 끊임없이 소음이 들려왔음에도 쓰기를 사유하고 상상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강연에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가장 부담 없이 글의 “쓰기”에 집중된 가장 많은 팁을 얻어가는 강의여서가 아닐지, 읽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법과 형식적 의미가 강의안에도 잘 녹아있어 차근차근 따라서 시도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강의 이후에도 특유의 분위기가 이어져 한두 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참석자가 함께 모여 이야기를 긴 시간 나누었습니다.

총 20명의 신청자가 모였고 원활한 합평을 위해 토요반과 일요반으로 나눠 7월 25일(토), 26일(일) 첫 모임을 시작으로 각각 5회차로 모임이 진행되었습니다. 대체로 글쓰기 경험이 있는 분들이었지만 취미로 써왔던 분에서 습작기를 거쳐 출간 경험이 있는 분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참여자가 모였습니다. 자전적 소재와 주제로 글을 쓰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며 이 기회에 충분한 글쓰기의 경험이 이뤄지도록, 글의 완성을 위해 예리한 의견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마감이라는 다가오는 일자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차례의 수정과 퇴고와 마감을 거치는 작가적 경험은 물론, 교정/교열, 본문과 표지 디자인을 거치고 출간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논의하며 진행해나갔고 마침내 11편의 작품이 담긴, 여성성소수자의 자전적 글쓰기 모음집 <여자는 여자를>이 책이라는 실물로 완성되었습니다.

출간기념행사와 낭독의 밤 스폐셜

낭독회와 영상회, 오토픽션 클래스가 진행되는 동안 각종 공연을 비롯해 출간을 기념하는 저자와 독자의 만남 등으로 오프라인 북 콘서트를 열심히 기획했지만 코로나19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온라인을 통해 출간 소식을 알리며 <여자는 여자를>의 필진 인터뷰와 트위터 이벤트로 얼리버드 할인 그리고 ‘여자는 여자를 ( )’ 문장 완성하기에 참여한 5명에게 책을 증정하는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낭독의 밤 스페셜 모임을 소개하는 포스터 이미지

또한 가열찼던 행사와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소박하고도 특별한 낭독회를 열였는데요. 2020년 12월 31일 밤 10시부터 자정까지 온라인으로 “퀴어 여성들을 위한 시”를 함께 읽고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습니다. 음료와 간식, 좋아하는 작품을 준비하고 신축년을 기념해 흰색으로 드레스코드도 맞췄습니다. 보통은 술자리에서 왁자하게 보내던 시간을 따로 또 같이 각자의 공간에서 근황을 나누고 좋아하는 작품을 낭독하며 들으며 마무리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진행 된 스페셜 낭독회 이미지. 줌 화면에 각자의 공간에서 근황을 나누고 작품을 낭독하고 있는 참가자들이 비춰지고 있다.

마치며

10여 개월 동안 10여명의 스태프와 참가자들이 모여 생업과 생활로 바쁜 귀중한 시간을 나누어 여성×성소수자인 우리의 존재를 찾고, 확인하는 읽고 듣고 보고 쓰고 말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예측이 불가할만큼 여파가 강했던 코로나19로 인해 방역지침을 철저히 따랐음에도 일정과 장소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다수가 모여야 하는 자리였기에 안타깝게도 모임을 기획했던 행사의 횟수를 줄여야 했고 뒤풀이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먼 거리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모여 논의부터 행사 준비와 마무리까지 우리를 위해 더 많은 우리로 모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고자 애써왔던 <2020 사포의 서재>가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앞으로도 퀴어 여성으로서의 우리와 삶이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은 문화적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며 한국레즈비언상담소와 사포의 서재가 언제나 여성 성소수자로서의 자긍심을 느끼며 확인하는, 다양성 있는 자원을 확보해가는 공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지와 성원을 바랍니다.

글 :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댓글 정책보기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