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손자영 캠페이너가 아름다운재단 기부자들과 함께 기부자 드로잉 모임을 가졌습니다. 미디어 속 ‘고아 캐릭터’의 장면을 함께 시청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가졌는데요. 기부자님들은 어떤 장면을 골라 바꿔 그렸을지, 또 그림을 그리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하시죠? 손자영 캠페이너가 기부자와 함께 한 그 날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
“대중들과 직접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미디어 패러디 일러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들었던 고민에 대한 답이었다. 미디어 인식개선 프로젝트에 대한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잘 닿고 있을까? 여기저기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지만 우리가 내고 있는 목소리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영 씨, 그러면 그 첫 시작을 기부자님들과 드로잉 모임으로 해보는 건 어때요?”
아름다운재단 기부자님들과 만난 다니 어쩐지 떨리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궁금한 마음도, 살짝 흥분되는 감정이 들었다.
“네 좋아요. 저도 만나 보고 싶어요.” 몇 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답해버렸다.
그렇게 기부자 드로잉 모임이 시작됐.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함께 일러스트 드로잉을 할 수 있을까?’ 기획과 동시에 여러가지 질문이 생겼다.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왜 나의 이름을 걸고 미디어 인식개선 프로젝트를 만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하면 됐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경험한 크고 작은 경험들이 지금의 프로젝트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개인의 삶에서 만들어진 마음 사전을 통해서 말이다.
마음사전에는 어린시절 다름을 느끼게 해준 단어들, 내가 싫어했던 단어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정의를 가진 단어들이 있다. 거짓말, 동화책, 목소리, 텔레비전, 어른, 편지, 앨범 그렇게 나의 삶에 영향을 준 7개의 단어들을 마음사전으로 꿰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이 지금의 프로젝트를 만드는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어떠한 에피소드가 있는지 글로 정리했다. 온전히 날 것 그대로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모임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과거를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깊은 안도감으로 느껴졌다.
행사 전날 밤에는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기부자님 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 갔다. 총 7분에게 7개의 마음 사전 속 단어를 담아 쓴 편지였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지금 나는 이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열여덟어른들이 바라는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등 작은 편지지에 적고 싶은 말들을 빼곡히 적고 보니 어쩐지 큰 편지지를 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러면서 아직 보지도 않은 기부자님들 금방이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행사 당일, 떨리는 마음으로 첫 마디를 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보육원에서 19년을 살고, 현재는 자립한 지 8년차가 된 자립준비청년 손자영 입니다.” 어쩐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육원에서 19년을 살았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첫 마디로, 그리고 자기소개의 앞단에서 이야기 하 할 수 있다는 점이 그랬다. 보육원을 퇴소하고 나서 한동안은 가장 숨기고 싶었던 ‘보육원 출신’이라는 말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낼 수 있는 이 자리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보육원에서 봉사를 오래도록 하신 요리사님, 정년 퇴직하신 중학교 선생님, 드라마 감독, 회사원, 대학생, 초등학생 친구 까지 다양한 기부자님들이 모였다. 한 분 한 분 모두 마음 사전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귀담아 들어주었다. 검은 머리를 거두면 안된다는 말이 싫어서 고동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는 이야기에는 함께 웃었고, 보육원을 나온 뒤 ‘고아’라는 것을 걸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이야기에는 함께 공감하며 위로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삶을 모든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온 마음을 다해 들을 수 있다면, 세상은 편견 없이 갈등 없이 좀 더 평화로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야기를 들은 후 미디어에서 부정적으로 재현된 드라마 속 차별 장면들과 대사들을 함께 봤다. 놀라는 모습, 눈썹을 찡그리는 모습,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숨,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어떤 기부자님은 차별장면을 반복해서 보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고. 나 또한 여러 번 보고 들은 대사 였지만 쉽게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차별의 장면과 대사를 바꿀 수 있는 시간과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차별장면을 함께 다르게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 저기서 연필과 색연필로 그림을 스케치하는 기부자님, 고심하면서 지우개를 몇 번이고 들었다 놨다 기부자님들 속에서 드로잉 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마치 우리를 응원하는 것처럼. 그러면서 이 분들이 모두 미디어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떨까 하고 상상 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드라마 차별 장면들이 반이라도 줄어들었을 텐데’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어떤 기부자님은 드라마 ‘지옥’에서 유아인이 떠나는 자살여행 대신에 다른 자립준비청년과 함께 책을 읽는 장면으로 바꾸기도 했고, 또 어떤 기부자님은 드라마 ‘내 딸 금사월’ 에서 고아라고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대신 안아주고, 위로하는 장면으로 바꿔 그렸다. 차별의 장면이 당사자의 시선에서 불편하지 않은 따듯한 그림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함께 차별 장면을 보고 바꾸어 보는 것만으로 드라마 속 수 많은 차별 장면들이 금세 다르게 바뀌었다.
그리고 바뀐 그림 옆에는 이런 응원의 말이 적혀 있었다.
기부자님이 바꿔 그린 그림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꿔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에요. 힘든 일, 기쁜 일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어요. 함께 힘내 봐요.”
“아파하지마렴. 응원하는 이들이 있단다.”
20대 초반, 세상을 바꾸려면 엄청난 힘과 재력이 있어야 가능하니 이번 생은 틀려 먹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허무주의에 젖어 산 적도 있었다. 그러나 20대 중반의 나는 조금 다르다. 개인이 엄청난 힘을 낼 수 없지만, 모인다면 큰 힘을 낼 수 있다고 믿는다. 기부자모임에서 함께한 좋은 어른들이 열여덟어른의 지지자가 되어준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목소리가 모인다면 드라마에서 우리는 부정적으로 그리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그리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기부자님들의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함께 힘내자는 말이, 응원하는 이들이 있다는 문장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시즌3 손자영 프로젝트 바로보기
👉 https://beautifulfund.org/eighteen-advocacy/
손자영 이야기 바로보기
👉 [손자영 프로젝트의 시작] 드라마를 보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https://beautifulfund.org/81916/
👉 [손자영 프로젝트]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 https://beautifulfund.org/826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