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부르는 주문” 

이주노동자 부부의 세쌍둥이 이른둥이 이야기

 

엄마는 오늘도 하루에 한번 짧은 면회시간, 세쌍둥이를 만나러 신생아중환자실로 향합니다

  중국인 선영(가명) 씨는 2011년 한국에 들어왔다. 5년여 동안 이주민 노동자로 한국에 거주하는 남편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제 고향은 요녕성 심양이고, 남편은 길림성 연길에 살았어요. 고향을 떠나서 공부하다가 직장에 다닐 때 남편과 만났죠.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다가 믿음직스런 모습과 따뜻함이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심했어요. 신혼은 길지 않았는데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남편이 한국으로 떠났기 때문이에요. 한 동안 그리워하다 ‘가족은 함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두 번 생각 않고 한국에 들어왔어요.”   2년 전,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면서까지 한국행을 감행한 데는 그리움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남편과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는 것. 당시 선영 씨의 나이가 서른넷, 남편은 서른여덟이라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결혼 초부터 아이를 기다렸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검사해도 별 이상이 없다는데 뭣 때문인지 애가 안 들어섰어요. 그래서 인공수정을 시도했고 두 번 만에 성공했어요.”   충남 아산에서 서울까지 2시간 30분을 달려가서 마음 졸이며 듣던 임신 소식. 선영 씨는 그 순간의 감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세상을 모두 가진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더군다나 쌍둥이라니 기쁨이 두 배일 수밖에. 착상된 지 2주밖에 안 된 아이가 벌써부터 보고 싶었다. 하루 빨리 두 아이와 만나 눈 맞춤하기를 바랐다.   세쌍둥이, 인큐베이터에 안기다   “세쌍둥이입니다!” 착상된 지 6주가 지났을 때, 초음파 검사를 하던 의사가 말했다. ‘맙소사! 하나 키우기도 벅찬데 셋이라니….’   할 말을 잃고 출산 후를 걱정하는 선영 씨에게 의사는 권하고 싶진 않지만, 선택유산이라는 것도 있다고 조심스레 알려줬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나 바라던 아이들인지 그제야 비로소 알아챈 것이다. 소중한 생명을 만나기 위해 먼 타국에서 대한민국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던 그때 그 간절한 마음이 소리쳤다.   ‘그 기다림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아이를 셋이나 데려왔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우리 부부를 찾아온 빛에 감사하자.’  

빛으로 엄마에게 찾아온 세쌍둥이 중 첫째, 산이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렇게 빛을 품은 여행이 시작됐다. 세쌍둥이는 무탈하게 자랐다. 이대로라면 4월 16일로 예상하는 출산도 순조로울 듯했다.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청명(淸明)이 지나고, 꽃이 만발할 즈음 아이들과 만나겠거니 생각했다. 만물이 움트는 생명의 계절에 태어나니 건강 또한 따를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한데 예상은 빗나갔다. 아이들은 두 달이나 빠른 2월 17일에 세상 문을 열었다. 31주 5일째였다.   “진통이 온 것도 몰랐어요. 집 근처 산부인과에 정기검진 받으러 갔더니 자궁이 다 열린 상태라고 하시더라고요. 하루 전날 가스 찬 것처럼 배가 올라왔다 내려갔다 그랬는데 그게 수축이었던 거예요. 진통이라고 느끼지 못해서 하루 더 버텼는데 큰일 날 뻔했죠.”   그날 오후 3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아이들이 제각각 자리한 위치 때문에 자연분만은 어려웠다. 결국 제왕절개로 세 명의 아이가 세상에 첫발을 내딛었다. 갓 태어난 산이, 강이, 솔이(가명)는 엄마 품이 아닌 인큐베이터에 안겨 생의 첫날을 보냈다.  

품에 안아 먹이고 싶은 엄마의 마음과 달리, 오늘도 엄마는 인큐베이터 안으로 손을 넣어 아이의 배고픔을 달래줄 수밖에 없습니다.

    기부, 어둔 사방의 빛이어라    “출산 당일에는 아이들을 보지 못했어요. 다음날부터 하루 1시간 동안 만나고 있죠. 처음엔 그저 울기만 했다니까요. 진짜 작아서 뭐 볼 것도 없는 아이들을 보니 눈물만 흐르더라고요.”   그나마 선영 씨가 입원 중일 때는 나았다. 1시간밖에 보지 못해도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으니까. 한데 아이들을 두고 퇴원해야 하는 순간 애간장이 끊어질 듯했다. 슬픔에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아픈 아이들이 밟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떨어지는 건 눈물뿐이던 그때, 함께 면회 온 다른 이른둥이의 엄마들이 그녀를 위로했다.   “힘들 거예요, 그래요. 이해해요. 하지만 그래도 울면 안 돼요. 아이 앞에서는 강해야 돼요. 아이들이 엄마가 우는 걸 느끼거든요. 분명 좋아질 거예요. 아이를 믿고 기다려 보세요.”   아이가 느끼고 있으니 강해져야 한다는 말은 강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영 씨는 ‘이른둥이를 둔 엄마’의 슬픔에 빠져 있었다. 울음소리도 삼키며 인큐베이터 안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이른둥이’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했다. 그네들에게 힘이 돼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상황에 압도돼 있었던 것이다.  

  “산이, 강이, 솔이를 위해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들이 건강해질 때까지 굳건히 일상을 지키는 거더군요. 특히 1.5kg여의 저체중에 동맥관개방, 개방난원공, 구개열, 입술갈림증, 신생아기타무호흡, 수유불내증 등으로 앞으로 꾸준한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둘째를 생각하면 좀 더 현실에 발 딛고 살아야 겠다 싶었어요.”   세쌍둥이라 보험에 가입할 수도 없고, 이주민이라 대한민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을뿐더러 대출도 막힌 선영 씨 부부는 이른둥이 세쌍둥이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한 첫 번째 실천으로 병원비를 지원 받을 수 있는 곳을 백방으로 알아봤다. 부지불식간에 부부를 짓누르는 물리적 비용을 해결해야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응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선영 씨의 지극한 마음은 마침내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에 닿았다.  

엄마를 응원하듯 품에 안겨 웃고 있는 세쌍둥이 중 셋째, 솔이

  “큰 수술 없이도 아이 셋이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를 받으니 병원비가 1천500여 만 원이나 나왔어요. 그걸 알고 있는 신생아실의 한 엄마가 저보고 병원 사회복지과에 가보래요. 저희 조건이 안 좋으니까 사실 별 기대 안 했어요. 그냥 물어나 보자 싶어 찾았는데 이게 웬일이에요. 신청 가능하다잖아요. 그것도 한 아이 당 최대 700만 원까지!”   지원이 확정되는 날 선영 씨 부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타국의 낯선 이들이 생면부지의 어린 생명에 이토록 큰돈을 선뜻 내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퇴원일로부터 6개월 내에 재입원하면 잔액 범위 내에서 지원받을 수도 있단다. 이 모든 게 아이들의 덕(德)이고 운(運)이라 생각하니 절로 희망이 솟았다. 이런 기회를 거머쥐었다면 분명 무탈하게 퇴원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겠다 싶었다.   기부와 나눔은 ‘탓하고픈 팔자’를 ‘의미 있는 인생’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전에는 남의 일로 치부했는데, 겪어보니 참으로 대단한 에너지를 지닌 게 기부더라고 선영 씨는 덧붙인다. 그녀가 아름다운재단과 교보생명이 함께하는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를 응원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자국인 뿐만아니라 이주민도 보듬는 마음은 분명 상상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더불어 살기 위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행보. 세 아이가 건강해지는 언젠가 선영 씨 또한 그 여정에 동참하리라. 그때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단 하나 한 눈 팔지 않고 서로를 지켜보며 마음껏 응원하는 일이다.      * 세쌍둥이 산이, 강이, 솔이는 2014년 3월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 입원치료비 지원사업을 통해 지원받고 있습니다.   

글. 우승연 ㅣ 사진. 이현경

   

아름다운재단은 교보생명과 함께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기금을 토대로 ‘2.5kg 미만 또는 37주 미만으로 태어난 이른둥이 입원치료비 및 재활치료비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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