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 청소년자발적여행활동지원사업 ‘길위의 희망찾기’ 를 통해 베트남 여행을 기획한 안남배바우도서관 아이들을 <월간옥이네> 기자가 동행하여 작성한 기획기사의 세 번째편 입니다. |
셋째 날
셋째 날의 놀라움은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이날은 모래가 바닷바람에 날려 만들어진 사구를 둘러보는 투어가 잡혀있었는데, 떠오르는 해를 보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다. 셋째 날 가이드인 성호와 동균이에게 우리를 깨워야 한다고 당부한 뒤 모두가 투어를 위해 일찍 잠들었는데, 새벽 4시가 되자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커튼을 열자 졸린 눈을 겨우 뜨고 있는 성호가 서 있었다. 어떻게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우리를 깨웠는지 묻자 성호는 “에너지 드링크 세 병을 먹고 밤을 새웠는데, 동균이가 먼저 잠들어버렸다”며 수다스럽게 지난 밤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어쩌면 가이드가 아니어도 누구든 일행을 깨웠을 텐데, 성호는 이 새벽에 문을 두드리는 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일행은 사막 같은 사구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빨간 모래 위에서 썰매를 타고, 어부 마을을 구경한 뒤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요정의 샘물을 걸었다. 모든 게 낯선 베트남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서는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끼는 걸까. 함께하는 여행에서 뭘 먹고 뭘 볼지 고민하는 건 결코 어른만의 일이 아니었다.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 언덕을 올라 선물처럼 떠오르는 해를 본다. 옆에서 누군가 “또 언제 이런 걸 보겠어”라고 중얼거린다. 저절로 그런 말을 중얼거리게 되는 풍경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실 풍경보다 중요한 건 풍경을 보는 기분이다. 익숙하지만 낯선 친구들과 풍경을 보는 기분. 난생처음 모래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는 기분.
해가 떠오르는 순간은 찰나일 테고, 우리는 또 어디론가 떠난다는 기분. 안남에서 온 사람들은 그런 기분이 든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다. 이 낯설고 따뜻한 기분이 일상을 보내는 순간에도 종종 떠오를까. 그러거나 말거나 애들은 모래 장난을 치며,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로고를 그리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기억하고 있었다.
넷째 날
넷째 날 아침은 호찌민 시에서 밝았다. 현지에서는 ‘사이공’이라고, 한국에서는 ‘호치민’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최대 경제도시. 베트남이라면 우리 중 가장 많은 걸 아는 은태 쌤은 호찌민 시가 남베트남 수도였다고, 서구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수노인 하노이보다 크게 발전했다고 말한다. 사실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호찌민 시가 대단히 큰 도시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교통편이 적어 관광객이 적고 물가가 싼 무이네보다 훨씬 복잡하고, 수십 대 오토바이가 거리를 누비고, 프랑스식 건물로 지어진 주요 관광지가 가득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차와 오토바이와 관광객이 다니는 도시에서 일행은 조를 나눠 다니기로 한다.
호찌민 시에는 프랑스식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60년 넘는 시간 동안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용되는 중앙우체국, 노트르담 성당, 통일궁, 호찌민 인민위원회청사, 떤딘성당 등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곳이 많지만 가장 궁금한 곳은 베트남 전쟁 박물관이었다. 전쟁이 얼마나 아픈 풍경을 가졌는지, 폭격 된 마을 사람은 어떤 표정으로 남겨지는지, 누가 이익을 챙기길래 전쟁이 일어나는 건지 겪어보지 않은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3층 전시실에 걸린 고엽제 피해자의 얼굴, 부모 잃은 아이의 얼굴, 일상을 잃은 마을의 얼굴, 겹겹이 쌓인 시체의 얼굴은 우리에게 전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많이 알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원한 숙소에 돌아가 게임을 하고 싶다던 백두는 수많은 얼굴 앞에 가만히 선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얼굴을 바라보던 백두는 이렇게 말한다. “아, 너무 끔찍하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비슷한 나이에 다른 삶을 사는 친구를 자주 만났다. 벤탄 시장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여러 기념품과 말린 과일을 파는 아이, 마사지샵에서 일하는 아이가 안남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였다. 전쟁박물관을 나와 점심을 먹었던 식당 KOTO에 있던 ‘Know one, Teach one’(한 가지를 알면 한 가지를 가르쳐라)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KOTO는 베트남 청소년·청년 자립을 돕기 위해 설립된 사회적기업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은 나와 얼마나 다를까. 매일같이 만나는 안남 아이들은 서로 얼마나 다른 환경과 성격과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나를 알면 하나를 가르치라는 말은 자꾸 배우려 하고, 배운 걸 바탕으로 나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저물고 크루즈에 오른 아이들은 배우고 사랑하려 했다. 베트남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는 경희에게 시은이는 자꾸 빵이나 치킨을 가져다준다. 엄마를 따라 베트남에 와봤다는 한솔이는 베트남어를 배우려고 가이드와 대화를 시도한다. 여행 마지막 날 빈컴센터에서 산 물건 들기 가위바위보에 진 친구의 짐을 선우는 말없이 들어준다. 가장 먼저 숙소 밤 편의점 문화를 만든 기용이는 루왁 커피며 베트남 모자 등 원하는 물건을 척척 산다. 여행 막바지에 다다른 아이들은 한껏 즐기고, 사랑하려 한다.
공항에 가기 전, 마지막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사이공스퀘어 곳곳으로 흩어진다. 처음에 쭈뼛쭈뼛하던 애들은 온데간데없고, 베트남에 오래 머무른 여행자처럼 익숙한 모습이다.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여행을 꾸려가게 하면서도 안전을 챙기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던 민들레 쌤은 “잘 먹고 잘 놀다 가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고 말한다.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공항에 앉아 여행의 이런저런 의미를 생각한다. 이런저런 의미도 있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고 잘 놀다 돌아간다는 데 제일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런 게 여행의 매력인가 싶다. 베트남에 함께 갔기 때문에 느꼈던 여러 놀라움을 하나씩 떠올린다. 비행기 창 너머로 호찌민 시가 멀어진다.
글, 사진 ㅣ 월간옥이네 김예림
○ 베트남 여행 밀착취재 시리즈
[청소년자발적여행활동지원사업] 개구리, 우물 밖으로 뛰어오르다_베트남 여행 밀착취재01
[청소년자발적여행활동지원사업] 이게 여행의 매력인가?_베트남 여행 밀착취재02
[청소년자발적여행활동지원사업] 여행과 여운 사이 _베트남 여행 밀착취재04
○ 이 글은 월간옥이네 2018년 10월호(통권 16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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