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
곰이다.
반달곰이야.
곰이 굴에서 나오고 있어.
겨울잠에서 깬 거야.
와ㅡ 대박.
반달곰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반달곰아,
올 한해 잘 지내, 행복하게.
올무 같은 거 조심하고.
알았지?
─ 제2회 곰깸축제 초대 영상에서
안녕, 지리산반달곰아!
겨우내 잠자고 있던 생명이 깨어나는 봄, 경남 하동 의성마을에서는 곰깸축제라는 지역 축제가 열린다. 지역 주민이 하나 되어 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축하하는 축제로 올해 2회를 맞이했다. 곰깸축제 홍보 영상에는 곰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올 한 해도 잘 지내, 행복하게’라는 염원과 애정이 메시지가 봄볕처럼 따뜻해 듣는 나도 모르게 곰의 안녕을 빌게 된다. 곰깸축제가 있은 지 어느덧 반 년. 한 해의 마지막이 가까워 오는 요즘, 문득 봄날 인사를 건네었던 곰들의 안녕이 궁금해진다.
의성마을 주민들과 곰깸축제를 만들어가고 있는 있는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이하 반달곰친구들)은 2017년도부터 ‘반달가슴곰(이하 반달곰)’과 공존하는 지리산 자락을 만들기 위해 지리산5개시군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올해는 특히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 작은조사 지원사업을 통해 지리산권 5개시군에 설치되어 있는 생태통로 조사 활동도 진행했다.
야생동물 길의 현실을 알아본 생태통로 조사사업
작년에 수도산으로 간 반달가슴곰 KM-53번(이하 KM-53) 그 친구 때문에 생태통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 전부터 ‘생태통로 놓을 때 면적을 더 확대해야 된다, 개수를 더 늘려야 된다’ 이런 내용을 환경부하고 국회 토론회를 하면서 제안하던 중이었는데, KM-53번이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 그때 ‘말로만 할 게 아니라 현장을 봐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이전까지는 아무리 조사를 목적으로 하더라도 생태통로 안에는 안 들어갔어요.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 동물들의 이동권에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구례군에서 생태통로에 보행로 공사를 한 것을 보며 ‘생태통로 안까지 제대로 보면서 조사해야겠다’ 생각했죠.
반달곰친구들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주옥님은 조사과정에서 만난 생태통로가 충격적이었다고 했다. 수풀로 우거진 생태통로 끝에 올무가 놓여 있었고, 그 올무에서 뼈가 될 때까지 걸려 있는 멧돼지를 발견하기도 했다. 주옥님은 그 올무를 보며 ‘인간이 끝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사가 마냥 충격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생태통로 중에 완전히 밀림처럼 풀로 뒤덮여 있는 곳이 있어요. 사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우거진 곳은 야생동물들도 다니기 힘든데, 풀을 정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올해 조사하면서 실제 현장을 본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조사를 진행한 한 생태통로 안에 버드나무 하나가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고라니가 그 나무를 긁은 흔적이 있더라고요. 사람이 봤을 때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도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물 길이 있는 거죠. 그래서 ‘아, 인간의 시각과 동물의 시각은 정말 다르구나, 우리가 보기에는 다닐 수 없는 길도 동물들은 잘 다니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죠.그 계기로 생태통로에 대한 제 생각도 바뀌었어요. ‘생태통로가 우리가 보기에는 폭도 좁고 그럴 수 있지만, 일단 이런 거라도 만들어야 야생동물들이 다닐 길이 생긴다. 그러니 현재 있는 것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또 혹시 다른 곳에 만들어질 때는, 폭을 넓게 하는 게 목적이지만 그럴 수 없는 환경이면, 좁게라도 더 많이 만드는 게 필요하겠다’라고 말이죠.
주옥님은 반달곰친구들과 함께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모임(이하 국시모)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11년 전, 지리산에 내려온 이후, 주민과 보다 밀착된 일을 하고 싶었지만 기존에 하던 활동 대부분이 개발 반대 운동이라 주민과 접점을 갖기 어려웠고, 새로운 매개를 찾아야만 했다. 국시모 활동과 관계있으면서도 주민들과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의제로 ‘반달곰’이 떠올랐다. 그렇게 주민과 만날 거리가 생겼고, 2017년 반달곰친구들이 꾸려졌다. 반달곰 주민인식조사, 올무 수거, 반달곰 서식환경조사처럼 실제 반달곰이 사는 현장과 주민을 동시에 만나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돈이 뭐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반달곰친구들은 지리산권 전체를 대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지원금 받는 사업에는 좀처럼 참여하지 않았다.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람과 마음이지, 돈이 우선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필요한 돈은 어떻게든 마련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 지역을 뒤흔드는 거액의 지원사업에 대한 불만도 작용했다. ‘돈으로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무분별하게 생겨나는 지원사업으로 지역 공동체가 상처 받는 사례들을 보면서, 지원사업은 안 하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지원사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 지원사업에 대해서 별로 생각이 없었어요. 지원사업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임현택 센터장(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을 계속 만나면서 ‘이게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지원사업을 통해 지리산권 안에서 함께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 지원사업으로 구례뿐 아니라 지리산 남쪽, 북쪽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단기간에 집중해서 조사할 수 있었어요. 사실 지리산 5개시군이 지역마다 특색이 각각 다 달라요. 한 데 묶는 게 쉽지 않은데, 생태통로 조사사업으로 반달곰처럼 지리산 공통 의제에 대해선 소소하게라도 지리산 네트워크의 틀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고 생각해요.
지리산 반달곰에게 개천절이란?
주옥님과 만난 날은 우연히도 개천절 하루 전 날이었다. 개천절이야말로 반달가슴곰에게 축제의 날이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과 함께 지리산 반달곰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우리 모두 반달곰의 후손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있는 것 같아요. 민족 신화에 곰이 나오는데, 이 땅에는 반달곰이 많이 살았었으니까요. 생태적 측면에서 반달곰은 생태계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에 의미가 있어요. 반달곰은 잡식 동물이라 생활 영역이 매우 크죠. 그래서 이 동물이 잘 살 수 있다고 하면 그 생태계는 어느 정도 건강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어요. 또 활동하면서 일본, 대만에서 곰이나 반달곰 보존운동하는 사람들을 알게 됐는데,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곰이 사는 숲은 신성한 숲이라고 여기더라고요.
육중한 몸매에 선명한 반달을 가슴에 품은, 3개월 동안 잔뜩 웅크린 채 겨울잠을 자고도 처음 굴을 나설 때 무릎 하나 절뚝이지 않는 신비한 매력을 가진 반달곰. 그 자체로도 신기하고 알아갈 게 많은 동물이지만, 지리산 반달곰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지리산 반달곰은 지리산 생태계의 연결자 역할을 해요. 오늘 여기 성삼재에 있던 곰이 내일은 천왕봉까지 갈 수 있고요. 이 반달곰이 먹은 노고단 식물 씨앗이 산 반대편에 가서 자랄 수도 있고요. 반달곰을 매개로 각기 다른 지리산권이 하나로 묶이게 되니, 반달곰은 그야말로 지리산 생태계의 든든한 연결자죠.
반달곰의 친구로, 지리산 사람들의 이웃으로
(사)반달곰친구들은 야생동물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반달곰이 살고 있는 서식지 안에서 나물, 버섯, 고로쇠, 약초를 캐며 살아가는 지리산 자락 사람들에게도 반달곰친구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복원사업으로 다시 우리 자연의 일부가 된 반달곰, 그리고 그 반달곰과 함께 살아갈 지리산 자락 사람들의 ‘조화로운 공존’을 목표로 반달곰친구들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곰에 대한 불만이 많지만, ‘걔네들도 생명인데 같이 살아야지’라고 말해주는 주민들의 숫자도 점차 늘어 가고 있다. 이 모든 변화를 곰이 다 했다고 말하는 주옥님. 그 겸손한 말 한마디에 반달곰에 대한, 그리고 지리산 사람들에 대한 주옥님의 애정이 느껴졌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차창을 가득 채운 지리산을 바라보며 저기 어딘가에 살고 있을 반달곰 가족을 상상해 보았다. 지리산의 깊어가는 계절을 나만큼이나 즐기고 있을 반달곰 가족들.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떠오르는 그들이 오래도록 안전하게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반달곰친구들과 지리산, 그리고 여기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건강을 나지막이 빌어 본다. “올 겨울도 잘 지내, 행복하게.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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