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열여덟 어른’ 손자영 캠페이너입니다. 시즌3 손자영 프로젝트는 저의 작고 사소한 일상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열여덟 어른으로서 일상에서 겪은 경험을 솔직하게 전합니다.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을 바라보는 편견은 미디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디어 세상 밖에서도, 수많은 당사자 친구들은 부정적인 경험을 마주하곤 합니다. 저는 미디어 안과 밖에서 겪는 당사자 경험을 바탕으로 손자영 ‘미디어 인식개선’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작을 여러분에게 들려드립니다.

만만한 고아

심심하게 돌아가는 보육원 생활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저녁TV를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보는 채널은 거의 비슷했다. 예능 아니면 드라마. 중학생 시절 여느 아이들처럼 나도 드라마에 푹 빠져 살았다. 드라마 본 방송부터 재방송까지 모든 시간을 바삭하게 외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느 밤 보육원 친구들과 함께 작당모의를 했다. 그건 바로 드라마의 본 방송을 사수하기 위해 취침시간에 TV를 몰래 보는 것이었다. TV를 보는 시간 외에는 TV장은 언제나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당직 선생님이 불시에 돌아다니기 때문에 쉬운 작전이 아니었다. 밤 10시가 넘자 우리는 하나 둘 씩 침대에서 나왔다. 그리고 자물쇠를 풀기 위해 실 삔으로 열쇠 구멍을 여기저기 쑤셨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우리는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르며 재빠르게 TV전원을 켰다. 소리는 거의 1에 가까운 음량으로 맞췄다. TV 상자속에 빨려 들어 갈 것처럼 숨을 죽이며 드라마를 봤다.

그날은 드디어 주인공의 진짜 정체와 과거가 밝혀지는 날이었다. 악착 같이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살아온 주인공의 숨겨진 정체는 바로 보육원에 버려진 고아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친 부모는 잃어버린 자식을 아주 가까이에서 찾고 있는 설정이었다.

“왜 맨날 고아야?”

“그러게 고아가 만만한가 보지. 그래도 쟤는 부모가 찾아.” 친구가 맞받아쳤다.

“하…하긴, 그렇네…”

내용이 반복되는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언젠가 친부모가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한 생각이었지만 나중에는 일기장에 적혀 구체적인 상상이 되었다.

보육원 입구에 검은 세단이 거칠게 올라온다. 차에서는 대기업 회장처럼 보이는 중년 남자와 엄마처럼 보이는 여자가 함께 내린다.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다. 세단에서 내린 이들이 찾는 친 자식은 누구도 아닌 나다. 그리고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하다면서 울며 불며 매달린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허구는 보육원에 살고 있는 사춘기 중학생에게 이런 상상을 자주하게 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친 부모가 날 찾아 올 리 없었고 나중에는 그런 헛된 희망을 갖게 하는 드라마가 밉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드라마에서 봤던 고아캐릭터들은 대부분 자신의 환경을 부끄러워했다. 고아나 입양아인 것이 밝혀지면 언제나 큰 일이 났고 주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책에서도 부모가 없는 신데렐라가 구박을 받은 것처럼, 드라마에서도 부모가 없으면 쉽게 구박을 받았다.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내 환경이, 아니 나의 존재가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육원에서 자란 것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드라마 대사가 우리에게 상처가 된 순간들

드라마에서 나왔던 거친 대사는 싸움에 무기로 쓰였다. “이 못 배운 고아새끼야”, “어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주제에” 우리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드라마에서 나왔던 대사를 인용하기도 했고, 드라마에서 나온 고아 캐릭터의 이름을 부르며 비꼬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던져진 문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어떤 사정으로 부모와 떨어져 있거나 부모가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은 결국 서로에게 던져져 마음 깊숙이 남았다.

보육원을 나오고 나서도 내가 고아인 것과 보육원에서 자란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리고 결코 이야기 되서는 안되는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보육원을 퇴소하고 나서 보육원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의 주제는 언제나 ‘고아인 것을 말했는지, 들켰는지, 반응은 어땠는지’ 였다. 밖에서 만나는 경우에는 암묵적인 표현으로 “잘 지냈어? (고아인 거) 걸렸어?” 하고 물었다. 그리고서 걸리지 않는 방법이나 감쪽같이 거짓말 하는 방법을 공유하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던진 말을 잊은 채 서로에게 의지하며 각자의 존재를 지켜줬다.

보육원을 퇴소하고 몇 년이 지나고도 친구와 함께 보는 TV 에서는 여전히 고아 캐릭터가 불쌍한 존재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고아구나.’ 하고 혼잣말로 읊조렸다.

‘우리가 제일 만만하긴 하지’ 하고 친구가 맞받아쳤다.

보육원에서 자립한지 꽤 지난 우리는 여전히 그대로인 TV속 주인공들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어쩐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이 불편함은 중학생 시절 TV에서 보았던 드라마, 사람들에게 겪었던 차별, 환경을 숨기기 해왔던 거짓말로 확장되어 갈 뿐. 여전히 그대로였다. 확장의 끝은 어디이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런 고민이 들수록 누군가와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넘어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는 목소리가 되었고, 손자영프로젝트가 만들어졌다.

시즌3 손자영 프로젝트 바로보기 

👉 https://beautifulfund.org/eighteen-advocacy/

손자영 이야기 바로보기

👉 [손자영 프로젝트의 시작, 드라마를 보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https://beautifulfund.org/81916/

👉 [손자영 프로젝트의 시작,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 https://beautifulfund.org/82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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